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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윤겸 <청파> - 가을날 맑은 언약, 청파

최열

깊은 못 어룡이 누웠겠지

늙은 홰나무 벼락까지 맞았구나

나그네 피리 소리 애달픈데

큰 강물 휘감으며 해 저문다


- 이덕무, <용산(龍山)>,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2권 



연암집단(燕岩集團)의 4검서(四檢書)이자 백탑시사(白塔詩社) 일원이었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글 <남한전장(南漢戰場) 독청비(讀淸碑)>를 지은 해인 1763년 가을 날 아름다운 모임이 있었다. 좌장은 화가 김윤겸(金允謙, 1711-1775)과 역관 원중거(元重擧, 1719-1790)요, 후배는 이덕무와 이희경(李喜經, 1745-1806이후), 이희명(李喜明, 1749-?), 원유진(元有鎭)이었는데 이들이 모인 곳은 남산 아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이 경영하던 송단(松壇)이었다. 이덕무가 지은 <송단후록(松壇後麓)에 오름>에 ‘가을날 맑으니 모두 굳센 기운이요[秋晴皆勁氣] 저녁 그림자는 갑자기 맑은 얼굴이구나[夕景頓淸容] 좋은 일 그림으로 모사함직 하거니[勝事堪摸畵], 두 어른 만났음을 깊이 즐거워하네[深歡二老逢]’라고 읊어 이 날 모임을 박팽년의 맑고 굳센 기개 만난듯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송단 모임의 좌장 김윤겸은 장동김문(壯洞金門)이 탄생시킨 6창(六昌) 형제 가운데 넷째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야 신분의 귀천을 알았겠는가마는 12살 때 부친을 여의고 철들자 출사(出仕)가 불가한 신분임을 깨우치며 시서화(詩書畵) 세계에 몸과 마음을 던지니 누가 알았겠는가. 눈부신 화가로 그 이름 수백년 뒤까지 전해질 줄이야. 물론 살던 당대에도 연암집단 구성원들이 높여 우러르던 중인예원(中人藝苑)의 거장이었으니 비록 몸은 낮았으나 뜻은 높았고 신분이야 중간이었으되 명성은 존귀하였다.


1763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세 명의 선비가 행장(行裝)하고 길을 나서는데 남대문(南大門·崇禮門)을 빠져나오니 곧 청파동(靑坡洞)이다. 화폭의 너른 벌판은 어떤 곳인가. 모악산(母岳山)에서 발원하여 독립문, 서울역을 거쳐 이곳 청파동을 세로지르는 만초천(蔓草川·넝쿨내) 아래 배다리[舟橋] 어느 어간이었다. 또 나룻배 떠다녀 한강같은 저 강물은 어느곳인가. 땅 생김으로 보아 목멱산(木覓山·1남산)에서 발원하여 이태원(梨泰院) 산줄기 아래로 흘러 만초천과 만나 용산호(龍山湖)를 이루던 어느 곳이겠다.


용산호는 『택리지(擇里志)』에서 이중환(李重煥, 1680-1752)이 이르는 바대로 한 가운데 연꽃이 나서 그 이름을 용산(蓉山)이라고도 하였고 고려 때 임금 행차가 머물러 꽃구경 즐겼다는 곳이다. 어디 그 뿐인가. 조선 때 조수(潮水)가 밀려들어 염창(鹽倉) 모래언덕이 무너짐에 10리나 되는 긴 호수[長湖]가 되었거니 8도(八道) 화물을 수송하는 조운선(漕運船)이 모두 용산에 정박했다는 곳이다. 오른쪽 저 멀리 치솟은 남산 위세가 가파르고 그 아래 배나무 많던 이태원 산줄기가 줄창 뻗어 동쪽 작은 설마재[小雪馬峴]를 지나 옥수동(玉水洞) 아래 두모포(豆毛浦)를 만날 즈음 한 번 솟구쳐 응봉(鷹峰)을 이루고는 끝내 한강으로 빨려들고 만다.


청파동에서 용산호에 이르는 일대는 성저십리(城底十里) 땅이 모두 그러하였거니 분주한 산업지구였다. 경강상인(京江商人)의 거점 포구로 최대의 물류(物流)가 흐르는 유통기지였으며 따라서 창고업이 발달해 군자감(軍資監)과 별영창(別營倉), 만리창(萬里倉)에 빙고(氷庫)까지, 벽돌 기와를 제조하는 와서(瓦署), 조선업이 발달해 다리 놓고 배 만드는 주교사(舟橋司), 전함사(典艦司)가 자리 잡았던 게다. 1876년부터 1882년까지 일본, 영국, 독일, 청국과 연이어 무역장정(貿易章程)을 조인함에 양화진(楊花津)에 개설된 자유무역시장 개시(開市)가 1884년에는 용산으로 옮겨와 개항시장(開港市場)이 형성된 이래 1910년 식민지전락을 앞 뒤로 남산에서 청파, 원효로(元曉路), 삼각지(三角地)에 이르는 지역이 일본군사령부 및 일본인 거주지로 변하고 말았다. 어찌 알았겠는가. 겨우 일백년 뒤라 해도. 그 해 송단의 언약 그리워 하며 용산에 머물던 이덕무가 읊은 시는 그래서 더욱 서글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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