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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쟁의 그늘 덮인 동작촌

최열

하! 너희 민인의 아픔이여       嗟爾下民困 

생각하면 마음 속 술 취한듯     念之中心醉

노 저어 맑은 강 거슬러 올라가는데 搖櫓泝澄流 

배는 어찌 그리 빠른지        舟行何太駛 

근심이야 날로 아득한데       憂端日浩渺

가을 물과 함께 닿는구나          正與秋水至


- 홍길주, <동작나루 배 안에서[銅雀舟中]>, 『표롱을첨(縹礱乙㡨)』 9권



흑석동(黑石洞)은 용산(龍山)에서 노들섬을 뚫고 노량진(鷺梁津)으로 나가는 한강대교와 이촌동(移村洞*二村洞)에서 반포동(盤浦洞)을 잇는 동작대교 사이 중앙대학교를 품고 있는 분지(盆地)와도 같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나는 돌 빛깔이 검정이어서 마을 이름을 검은돌이라 불렀다. 검은돌에서 비개고개를 넘어가면 곧장 동작동(銅雀洞)인데 이곳에 동재기나루라 부르던 동작진(銅雀津)이 있고 배물다리라 부르던 이수교(梨水橋)가 나온다. 동재기나루는 한양에서 과천, 수원을 잇는 포구(浦口)로 조선시대 때 병선(兵船) 6척을 배치하여 치안 질서를 유지할만큼 번화한 시장을 이루었다. 


화가 장시흥(張始興, 1730 무렵-1789 이후)의 작품 <동작촌(銅雀村)>은 바로 그 곳을 멋지게 묘사한 그림이다. 오늘도 한강은 여전히 흐르고 또 흑석동, 동작동 그대로지만 저 모습 찿을 길 없다. 기껏 40년전인 1967년 12월 서울시장 김현옥(金玄玉, 1926-1977)이 시작한 한강종합개발이 그 풍경 지워버렸다. 그래도 이촌동 강건너 흑석동 쪽 바라보면 제법 높은 절벽 있어 짐작할뿐 그저 그림 속 가만히 살펴 보는데 두 개의 솟구친 검은 바위를 화폭 아래 한쪽으로 치우쳐 세워놓은 것이 기묘하다. 벌어진 틈 사이 계단 길 내놓고서 양쪽으로 반듯한 기와 집 쌓아 올렸으니 가파른데도 아늑하다. 이런게 바로 그릇 안쪽 분지렸다. 그대로 두면 휑할 뻔 했는데 화가의 감각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저 멀리 졸고 있는 소와 같다 하여 이름지은 우면산(牛眠山)을 뚜껑처럼 덮어 놓았던 게다. 아마도 여기서 그쳤다면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가는 세 척과 여덟 척으로 나눠 모두 열 두 척 돛배를 강 아래 옹기종기 늘어두었으니 땅과 물 사이 숨길 터놓았다. 


동작나루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이 드나들던 포구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한양 상권을 나눠쥐었던 칠패(七牌) 상인과 거래를 텄는데 대개 18세기 전반 어느 무렵이었다. 『각전기사(各廛記事)』 1746년 11월자에는 남대문 밖 칠패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장[亂廛]을 설치하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거래한다 하였는데 이 때 칠패상인이 수입하는 물품 절반이 모두 동작진에서 나온다 하였다. 거대 도시 한양을 나와 나루터의 번화함을 누비던 화가 장시흥은 번영의 주인인 경강상인은 물론 거대한 사상도고(私商都賈)의 성장을 목격했고 누군가 이곳 동작진을 그려달라하자 겁 없이 치솟아 오르는 상인들의 기세를 두 갈래 절벽같은 검은돌에 아로새겼음이 분명하다.        


18세기 중엽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장시흥은 그 출신과 행장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국가 기록화 사업인 의궤(儀軌) 제작 업무에 숱하게 참여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인데 다만 17세기 장자성(張子晟, 1664-)으로부터 비롯하는 화원명가 인동장씨(仁同張氏) 가문 출신이 아닐까 싶지만 이것도 막연한 짐작일 뿐이다. 또 뒷날 연구자 들은 장시흥이 정선(鄭敾, 1676-1759)이나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화풍을 되풀이 하고 있어서 주목할만한 화가가 아니라고 낮춰보고 있지만 기껏 열 점 밖에 남지 않았고 또 명가 중심의 관점으로 헤아리는 판단일 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그림은 모두 도성 명승지를 그린 것으로 당대 세가(勢家)의 주문에 따른 제작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어찌 화가의 눈길과 감흥을 감출 수 있겠는가. 화폭에 쓴 대로 그 아호(雅號)가 방호자(方壺子)라, 네모진 항아리란 뜻인데 이처럼 기이하여 알 수 없는 말을 제 것으로 삼는 인물이라면 특별한 세계 갖춘 이였을 게다. 


중앙대 앞 한강가엔 1954년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사재를 털고 국방부, 학도호국단의 협력을 얻어 학도의용병(學徒義勇兵)과 육탄십용사(肉彈十勇士) 현충비(顯忠碑)를 세웠다. 전쟁의 그늘이 검은돌의 위용을 덮었던 것인데 이 때 검은돌 옆마을 동작촌에서도 국립묘지 현충원(顯忠園)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이십년 뒤인 1978년부터 1984년 사이 완공한 동작대교로 말미암아 동재기나루며 배물다리는 사라졌다. 물길 깊어 잉어가 뛰놀던 곳, 이제 다시 볼 수 없지만 땅 위로 올라간 물고기들이 그 혼령의 누리 지키고 있을까. 


사립미술관 표롱각(縹礱閣)의 주인이자 빼어난 문인 홍길주(洪吉周, 1786-1841)가 1830년 8월 어느날 군수(郡守)로 부임하러 충청도 보은(報恩) 향해 배타고 동작나루 건널제 부른 노래 <동작나루 배 안>에서 민인(民人)의 고단한 삶 읊조리니 얼마 전 별세한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묘소까지 아울러 근심 흐르는데 저 장시흥이 보았던 부자들 화려함과는 너무도 다르고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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