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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노량진의 사육신 노래

최열

묘당 깊은 곳 슬픈 거문고 소리      廟堂深處動哀絲

세상 모든 일 이제는 알 수 없어      萬事如今摠不知

버들가지 푸르고 봄바람 가늘디 가는데  柳綠東風吹細細

밝게 핀 꽃 봄날은 더디고 더디구나   花明春日正遲遲


- 박팽년, <묘당심처(廟堂深處)> -남효온(南孝溫), <육신전(六臣傳)>, <추강집(秋江集)>



노량진(鷺梁津)은 용산(龍山)에서 한강대교를 잇는 포구(浦口)로 정조(正祖) 시절엔 배다리를 설치하는 곳이었고 또한 경강(京江)의 3대포구의 하나였으니 사람도 물건도 가장 많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 게다. 누구나 쉬쉬했으되 노량진엔 다섯 무덤이 모여있었고 사람들은 사육신묘(死六臣墓)라 하였다.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도 나오지 않는 묘역이지만 인구에 회자되어 오다가 박팽년(朴彭年)의 6대손이 봉분(封墳)하고서 1651년 허목(許穆, 1595-1682)에게 묘비명(墓碑銘)을 쓰게하였으니 육신총(六臣塚)이 ‘노량진 아래 강 언덕 위’에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야(朝野)에 사육신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분분하자 숙종(肅宗)은 1679년 무덤을 가꾸게 하였고 1682년에는 동작진(銅雀津)에 육대사(六臺祠)를 세웠다가 1691년 12월 노량진 다섯 무덤 윗쪽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창건하여 추숭(追崇)하였다.


화가 장시흥(張始興, 1730 무렵-1789 이후)이 그린 <노량진>에는 가파른듯 둥그런 봉우리에 기와집이 즐비하여 상업 포구(商業浦口)의 성세(盛世)를 말해주고 있지만 그림엔 서원도 묘역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원묘(園墓)를 향해갈제 배다리 건너 잠시 쉬곤하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화폭 왼쪽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300년 전인 1453년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당대 집정자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장군을 격살(擊殺)하고 집권에 성공했다. 새로운 집정자수양은 정권을 잡은지 두 해가 채 지나지 않은 1455년 윤6월 겨우 15살의 조카이자 어린 왕 단종(端宗) 이홍위(李弘暐, 1441-1457.10.21)를 강제로 내몰고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한 해 뒤인 1456년 6월 2일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이개(李塏, 1417-1456), 하위지(河緯地, 1387-1456), 유성원(柳誠源, ?-1456),김문기(金文起, 1399-1456), 유응부(兪應孚, ?-1456)를 비롯한 이들이 단종, 세조(世祖), 세자가 한 자리에 모인 창덕궁 연회(宴會)에서 왕을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거사 직전 밀고(密告)에 따라 세조는 곧장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여 국문(鞠問)을 벌였다. 쇠꼬챙이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는 고문(拷問)에도 성삼문은 얼굴 빛조차 바뀌지 않았는데 마침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세조 앞에 서 있었다. 이에 성삼문은 “나와 네가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 세종(世宗)께서 날마다 왕손(王孫·단종)을 안으시고 거닐면서 이르시길 ‘과인(寡人)의 천수만세(天壽萬歲) 뒤에 경(卿)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시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 터, 너는 홀로 이를 잊었는가. 너의 극악함이 이 지경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구나”라고 호령(號令)하였다. 또 세조는 무장 유응부의 살 가죽을 벗기고 물었지만 입을 다물자 불에 달군 쇳덩이를 가져다 배 아래를 지져댔다. 얼굴 빛조차 변함 없다가 “이 쇳덩이는 식었다. 다시 달구어 가져 오너라”고 호령하여 무서운 기개를 보이더니 사형 당하던 날 울음을 터뜨리며 “살아서도 가질 것 없었는데 죽을 때에야 큰 재난[禍]을 얻었도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참혹스레 죽어간 사육신(死六臣)의 삶은 무거운 시절엔 “삶이 또한 큰 보람[生亦大]”이지만 가벼운 시절엔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死猶榮]”이라 읊었던 이개의 노래 그대로였다. 이렇게 스러져간 피해자가 모두 70명이었다.


얼핏 보면 그림은 이 모든 비참과는 동떨어진 풍경이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바람조차 잠든 날의 화폭임에도 다섯그루 버드나무가 폭풍우 만나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데 어인 일일까. 화가가 그릴 당시 박(朴), 유(兪), 이(李) 셋과 성(成)씨 부자 둘 하여 모두 다섯 무덤만 있었으므로 모진 바람 견디는 다섯그루만 그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주 지나던 정조가 1782년 이곳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고 1977년 하(河), 유(柳), 김(金)의 묘를 만들어 비로소 일곱 무덤이 완성되었다. 문득 노량진 수산시장(水産市場) 들를 때면 혹여 죽어간 귀신이라도 만날까 두리번 거리는데 아득한 옛 박팽년의 서글픈 노래만 들려올 뿐이다. 그 노래는 수양대군이 베푼 궁중 연회에 참석하여 어지러운 시절을 노래한 가락인데 대군이 좋아하여 여러 벌 베껴 곳곳에 붙여두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몇 해 뒤에 일어날 죽이고 죽는 참화를 짐작조차 했겠는가. 수양의 왕위 찬탈과 박팽년이 세조를 격살하려는 계획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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