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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꿈같은 옛, 양화나루 잠두봉

최열

봄 하늘 어둑하고 햇살은 산을 품었는데

가랑비 맞으며 조각배에 술을 싣고 돌아왔지

꿈같은 옛날 놀던 때 어이 다시 있을까

속절없이 아름다운 노래 사람 세상에 남겼구나 


- 권필, <주행(舟行)>, 『석주집(石洲集)』 제7권 



서강(西江)이라고 부르는 서호(西湖)는 한강(漢江)의 마포(麻浦)와 양화진(楊花津) 사이에 있는데 지금 서강대교(西江大橋) 북쪽끝 잠두봉(蠶頭峰) 앞 일대다. 서호로 흘러내리는 봉원천(奉元川)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면 신촌(新村) 네거리와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를 지나 그 끝 안산(鞍山) 서남쪽 기슭에서 발원지를 만날 수 있다. 봉원천은 깊고 푸른 냇가라하여 녹계천(綠溪川) 또는 싸늘한 냇가라하여 창천(滄川)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은 온통 아스팔트(asphalt)로 뒤덮여 흔적조차 알 길 없는 땅 속 물길이 되고 말았다. 봉원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치솟은 절벽을 만나는데 바로 이곳이 누에 머리 생김새라 하여 잠두봉이라 불렀지만 1866년 이후엔 머리가 잘렸다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이란 이름을 새로 얻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1866년 8월 프랑스 함대가 서호에 이르러 협박하다가 9월엔 강화도(江華島)를 무단 침입하여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점령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위기의식이 심화되던 이 시절 당대 집정자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민인(民人)의 분노를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여 협력한 서학교도(西學敎徒)에게 돌려 응징하였다. 정부는 군함을 내세워 협박하였던 이곳 양화진 잠두봉을 골라 천 명이 넘는 신자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이런 참변 이전까지 잠두봉 또는 누에머리는 평화로운 승경지(勝景地)였다. 마포팔경(麻浦八景)이나 서호팔경(西湖八景)의 한 곳으로 불리웠던 것인데 그로부터 한 세기 이전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이 양천현령(陽川縣令)으로 부임하던 1740년 7월 그렸을 그림 <양화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 다시 없을 모습 그대로다. 화폭 중앙 서호에서 솟구친 바위 위로 봉우리가 아름답고 왼쪽으로는 숲 속 큰 집이 아늑하다. 1863년 이후 간행한 책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왕족 이총(李摠, ?-1504)의 별서(別墅)가 양화진에 있다하였으므로 혹 그 큰 집이 이총 후손가 소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짐작할 일은 아니다. 일대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1396-1486)의 망원정(望遠亭),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1394-1462)의 영복정(榮福亭),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의 담담정(淡淡亭)이 즐비하여 명멸을 거듭하였으니 이곳 잠두봉 곁 또한 주인도 건물도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상단 왼쪽으로 치솟은 산은 시선으로 보아 와우산(臥牛山)이 아닌가 한다. 가파른 모습이야 빗겨 보았으니 그런 생김 나온 것일터 큰 소가 길마는 무악(毋岳)에, 굴레는 북 애오개[北阿峴] 네거리에 벗은 다음 서호를 향하다가 와우산에 누웠다는 것이다. 그림엔 보이지 않지만 동쪽 기슭엔 광흥창(廣興倉)과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사당(祠堂)이 있다. 꿈속에 나타난 공민왕께서 이곳에 올 때면 잠시 쉬어갈 자리 언덕에 마련하라던 분부 받든 광흥창 창고지기가 지었다는 사당 안엔 왕비와 왕자, 공주는 물론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영정(影幀)까지 봉안하고 있으니 조선을 창업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코밑에 정적(政敵)이 버티고 있음은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반란의 요새이긴 커녕 와우산은 목동들 피리소리[牛山牧笛] 구슬프던 땅이요, 끝자락에 양화진은 저녁노을 붉게 비추던[楊津落照] 나루터였다. 왕조가 바뀌건 말건 그저 하염없이 아름다울뿐인 한양 명승이었던 게다. 


그 모든 풍경 사라진지 오래인 지금, 와우산 자락엔 홍익대학교(弘益大學校)가 자리잡고 구비 흘러 강변엔 당인리 화력발전소 터가 괴물처럼 버티는데 잠두봉엔 절두산 순교기념관과 또 그 곁 양화진을 지키던 관청 양화진영(楊花鎭營)이 사라진 자리엔 외국인 선교사(宣敎師) 공동묘지가 생겨났다. 게다가 일대를 가로 세로 지르는 당산철교, 양화대교, 강변북로가 잠두봉과 양화진을 가려버렸으니 오늘이 옛을 가린다는 말 그대로다. 강변북로 제3로는 1969년에 완공한 한강대교 북쪽부터 양화대교 북쪽을 잇는 길인데 1984년엔 대건로(大建路)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식 때 교황(敎皇) 방문을 계기삼아 요청한 결과로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 1821-1846)을 기린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절두산 꼭대기에 서 있는 동상 김대건 신부야 흐뭇하겠으나 수백년 혼령이 머물고 있을 공민왕이며 최영 장군, 안평대군 게다가 1894년 이곳에서 시신을 또 다시 죽이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의 처절함을 당한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어찌 달래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선가 아주 오래전 유배지로 가던 길에서 국문(鞠問) 때 맞은 매 장독(杖毒)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문예성세(文藝盛世)의 거장 권필(1569-1612)의 가슴시린 노래 속절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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