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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봉홧불 타오르는 질마재

최열

푸른 하늘 교묘함이야 형체 어디 있겠나

연기 낀 호수 드러내 그림 속에 담았네

출렁이는 강빛은 푸른 스님 눈을 담았고

짙은 산빛은 푸른 부처 머리와 닮았구나


- 김종직, <어제망원정>, 『점필재집』 제19권



정선(鄭敾, 1676-1759)이 양천현령(陽川縣令)으로 재직하던 시절 강건너 도성(都城) 쪽에 피어오르는 봉홧불을 바라보곤 하였으니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을 제작할제 그 풍경 빼놓을 수 없었다. 65살이 넘어 한양을 떠난 정선은 양천현(陽川縣) 관아(官衙)에 머물며 강건너 양화진(楊花津)을 건너오는 이들을 맞이하곤 할 때마다 저 멀리 인왕산(仁王山) 넘어 한양 시절을 추억하곤 했을 것이다. 정선은 한강 건너 소식 전하는 봉수대(烽燧臺)가 있는 안현(鞍峴ㆍ질마재) 봉우리를 한 복판에 배치한 다음 그 바로 뒤 어깨너머로 인왕산을 채워두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왕산은 우람한 위용(偉容)인데 웬일인가 그림의 인왕산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푸근하니 아마도 십여년 전인 1728년 봄부터 이사하여 살고 있던 인왕산 자락인 탓에 그렇게 그렸나 보다. 살림집이니 어깨 넓어 믿음직하긴 해도 역시 어머니가 아이를 품은듯 따스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복판의 안현은 가파르게 치솟아 추종을 불허하는 형상이다. 꼭대기에 붉은 봉홧불이 타오르니 오늘 저녁 전국이 안녕하다는 소식이다. 


서대문 밖 금화산(金華山) 서쪽엔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가 있고 굴(窟)을 뚫고 나가는 터널(tunnel) 오른쪽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와 도선(道詵, 827-898)이 889년에 창건하였다는 봉원사(奉元寺)가 있는데 그 뒷산이 질마재다. 삼십 년전이니까 군부독재 시절인 1980년대라 가끔 질마재를 넘나들곤했는데 시위대가 경찰에 해산당할 때면 이 산속으로 쫒겨 숨어들다가 연세대 교정으로 나아가곤 했던 것이다. 그 때만해도 이 재에 봉수대가 있는줄 몰랐었는데 알았다면 그 봉홧불을 민주주의 횃불의 상징이라고 이름지어주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국토의 평안함 전해주고 재난도 알려주는 불꽃 봉우리였으니까 평화나 민주를 떠올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을 것같다. 


질마재 아래 와우산(臥牛山)은 소가 누워 편안하고 그 왼쪽으로 솟아오른 강변 봉우리는 아마도 홍제천(弘濟川)을 끼고 솟은 성산(城山)인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강 줄기 아래 화폭 하단 왼쪽과 오른쪽 사이는 이미 알려진대로 가양동(加陽洞)의 파산(巴山)과 탑산(塔山) 사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염창동(鹽倉洞) 증산(甑山)과 양평동(楊坪洞) 염창산 사이 안양천(安養川)이 한강과 만나는 곳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한강의 기적이니 민족의 예술이니 하는 구호를 내세운 1968년 한강종합개발과 더불어 강변제방도로(江邊堤防道路) 사업으로 벼락을 맞은듯 워낙 바뀌고 또 바뀌어 안양천 제방(堤防)과 염창교, 양화교같은 다리가 들어서고 또한 쥐처럼 생겼다 하여 쥐산이라 부르던 염창산과 그 앞 고양이처럼 생겨 굉이산이라 했다던 선유봉(仙遊峯)도 흔적 있는 듯 없으니 다만 근래 만든 인공폭포만 덩그러니 옛 가승처(佳勝處) 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림 속엔 이곳이 강화도(江華島)로 나아가는 교통요지이자 세곡선(稅穀船)과 경강상인(京江商人)이 몰려들던 번화한 상업지구였음을 알려주지도, 또한 명사들이 즐겨 찿던 승경(勝景) 지대였음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한가한 초옥(草屋)에 그저 돗단배 몇 척이 여유로워 거울같이 광활한 서호(西湖)임을 드러낼뿐. 그래서 화가는 성산 아래 망원동(望遠洞) 강 가까이 자리하여 이름난 건물도 소나무와 버드나무 숲으로 가려버린 것일 게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그윽한 생활을 누렸던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1396-1486)가 1424년 성산 아래 별서(別墅)인 망원정(望遠亭)을 짓자 다음해 아우이자 임금인 세종(世宗, 1397-ㆍ재위1419-1450)이 비내리던 날 그 정자에 올랐다. 농사철 들판을 적시는 비에 흡족하여 그 정자에 희우정(喜雨亭)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감격한 대군은 당대 문장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 1396-1430)으로 하여금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은 “백악산(白嶽山ㆍ華岳)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며 서남쪽 여러 산은 넓고 멀어 아득하니[蒼茫] 구름과 하늘과 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듯, 굽어보면 물고기며 새우까지 뚜렷하게 셀 수 있는데 바람 실은 돛과 모래 위 새들은 바로 자리 아래 오가고 천여 그루 소나무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 어른대는구나”라고 묘사였다. 한 세대 뒷 사람으로 사림종장(士林宗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왕명을 받아 망원정을 읊었는데 ‘세상의 어느 화가가 끝내 저 광경 그려낼 수 있겠느냐’고 묻고서 스스로는 다음같은 문자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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