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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김윤겸 <송파환도> - 송파나루 건너 남한산성

최열

사람이나 귀신도 마음 기댈 곳 없는데  人鬼依違忽

세월은 속절없이 바뀌어가고       炎凉代謝悠

시를 이뤘어도 부칠 데 없는데      詩成未所寄

저물녘 숲 속 새들은 어디로 깃드는가  林鳥暝何投


- 김창흡, <율북단오(栗北端午)>, 『삼연집(三淵集)』



672년 당(唐)나라 침공에 대비하여 신라 문무왕이 남한산(南漢山)에 성(城)을 쌓았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군대와 남한산성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양(漢陽)을 수도로 정함에 따라 바로 이곳 남한산은 수도방어 요충지가 되었다. 인조정변(仁祖政變) 공신 이괄(李适, 1587-1624)이 한양을 점령했다가 패전한 뒤 삼전도(三田渡)를 건너 광주(廣州) 땅으로 도주했다가 부하의 배반으로 실패했는데 이 때 충청도 공주(公州)까지 피신해야 했던 인조가 놀라움을 진정시키려 했음인지 남한산성 축성(築城)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627년 후금(後金*淸)의 침입에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했다가 항복한 인조는 참지 못하고 1636년 청나라와의 결전 의지를 전국에 선언하였다. 


인조의 전쟁선언 소식을 들은 청나라는 1636년 12월 9일 13만 대군으로 하여금 압록강 건너 질풍노도처럼 한양을 점령해버렸다. 혼비백산한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 하였지만 길이 막혀 1만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16일 성 아래 탄천(炭川) 벌판에 집결한 청나라 군대는 선봉군을 보내 남한산성 일대를 포위하고서 기다리기로 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부족한 땔감에 식량마저 없었으므로 성안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을 것이다. 해가 바뀐 1637년 버티기 45일째인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5백명의 신하를 이끌고 삼전도로 나아가 청국(淸國) 태종 홍타이지(황태극皇太極)에게 스스로를 ‘낮은 땅의 값싼 신하[下土賤臣]’로 낮춘채 업드려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였다. 


목숨을 부지한 인조는 항복한 땅 삼전도에 세울 기념비(記念碑) 글을 그 해 11월 작성하고 심혈을 기울인 끝에 1639년 2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건립하였다. 이 유명한 삼전도비는 지금도 송파(松坡) 삼전동(三田洞) 백제초기 적석총 옆에 자리잡고 있는데 만주문자, 몽고문자, 한자의 3개국 문자로 제작된 특이한 비석이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갈 무렵 사람들은 인조의 항복 사건을 삼전도의 치욕이라 이르면서 또 한강을 건너는 교통요지인 삼전나루를 폐지하고 바로 곁 송파나루[松坡津]로 옮겨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청나라의 위세에 감히 비석을 치워버릴 수 없었다. 청나라가 없어진 일본 강점기 때에야 그 비석을 땅에 뭍어버렸다가 해방 뒤 파냈지만 1956년 문교부가 치욕스런 기록물이라며 다시 파뭍었다. 하지만 치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비가 내림에 강가에서 비석이 솟아 오르니 지금 자리에 옮겨 세웠다. 


남한산과 송파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 일대 온조왕(溫祚王, ?-28)의 터전이었다. 그러므로 남한산성의 추억을 지닌 인조가 청나라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를 삼전도에 세우던 그 해 1639년 산성 안에 사당을 건립하고 거기 온조왕을 모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조차 청나라의 눈치를 보던 일이었으니 그 사당이 숭열전(崇烈殿)이란 이름을 제대로 갖춘 때는 일백오십년이 흐른 1795년 정조 때였다.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의 <송파환도(松坡喚渡)>는 봄날 송파나루 뱃사공을 부르는 선비를 그린 그림인데 지금 서울종합운동장 옆 탄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곳 풍경이다. 상단에 장엄한 남한산이 펼쳐졌고 능선을 따라 소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산성임을 알려준다. 왼쪽엔 천마산(天馬山)이 가깝고 오른쪽엔 검단산(黔丹山)이 아득하다. 그림만으로서야 일백년 전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떠올리며 그렸는지 알 길 없지만 김윤겸의 가문이 저 병자호란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생각하면 무심결에 그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김윤겸의 고조부(高祖父)가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모시며 결사항전을 주장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었고 김상헌은 항복 이후 인질로 잡혀가서도 결코 무릎꿇치 않았다고 하여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주장한 사람들 사이에 그 명성이 조선천지를 뒤흔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 후손 김윤겸은 저 남한산 몸체에 칼질하듯 두 군데 깊은 상처를 내버렸고 나루터에 거칠고 억센 모습의 나뭇가지를 늘어두었던 것일 게다. 그래선가 그림 전편에 웬지 서늘하고 불안한 공기가 감도는 것은 분명 전쟁의 추억 탓이므로 김윤겸이 살던 시대의 태평성대만 떠올릴 일은 아니다. 송파나루 건너 저 남한산성에 올라 수어장대(守禦將臺)에 선 김윤겸은 사방 팔방 툭트인 산하 내려다 보며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큰아버지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송파나루 건너 뚝섬 옆 저자도(楮子島)에 머물제 읊조린 가락 구슬픈 목청으로 한껏 불렀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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