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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경희궁의 추억, 북일영

최열

호랑이같은 무부 날카로운 기운 쌓아          如虎武夫氣蓄銳

단에 올라 북 한 번 치매 무예를 다투는데   升壇鼓乃爭藝

넓은 마당에서 해마다 상을 거듭 받았거니   廣庭沾賞無虛年

분부컨대 숙위를 삼가 잘하거라              分付渠曹愼宿衛 


- 정조, <무예를 보고>,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권



1593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 명나라 낙상지(駱尙支) 장군이 조선 조정에 도움말을 주었다. 이에 따라 조정은 군대를 5군영(五軍營)으로 재편하였다. 그 가운데 수도경비를 책임질 군영의 하나가 훈련도감(訓練都監)이다. 훈련도감은 3수군(三手軍)을 양성하였는데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였다. 총과 대포를 쏘는 포수, 창검을 휘두르는 살수, 활을 날리는 사수로 나누어 기르고 보니 비로소 강력한 무위를 떨칠 수 있었을 게다. 


훈련도감은 지금 신문로 1가인 서부 여경방에 사백여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197칸의 큰 청사를 두었다. 수도 방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창덕궁 서쪽 공북문 밖에 무려 235칸에 이르는 최대 규모의 북영(北營)을 설치하고 또 돈화문 밖 동쪽으로는 32칸의 남영(南營)을 두었다. 종묘가 있는 동부 연화방에 동별영(東別營)을, 마포에는 서별영(西別營)을 두었으며, 15칸의 아담한 북일영(北一營)은 사직단이 있는 인왕산 자락 끝에 두었다. 사직단 남쪽으로 경희궁(慶熙宮)이 있었는데 북일영은 경희궁 북쪽 무덕문 밖에 있었고 또 그곳엔 큰 활터가 있었다. 훈련도감은 1882년 그 사명을 다한 끝에 폐지되었고 산하의 북영은 무관학교로 바뀌었다가 1923년 '경성 시가지 개수령' 이후 주택지구로 바뀌어 오늘날 북촌지역으로 빨려들어갔다. 북영이 있던 그곳은 오늘날 원서동(苑西洞)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식민지 시대 때 창덕궁을 비원(秘苑)으로 격하시킴에 따라 비원 서쪽이라고 해서 원서동이라 했던 것이니 그곳이 수도를 호위하는 군대의 본영이라는 기억조차 지워지고 말았다. 


북일영의 운명은 더욱 쓸쓸하다. 바로 아래 자리한 경희궁의 운명 때문이다. 경희궁은 광해(光海, 1575-1641 *재위1608-1623)가 1617년부터 1623년 사이에 새로 지은 궁궐이다. 처음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는데 1760년에 경희궁으로 바꾼 것이다. 인조(仁祖, 1595-1649 *재위1623-1649)의 아버지 시호가 경덕(敬德)인데 소리가 같으므로 피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광해를 내쫒고서 왕위를 차지한 인조 아버지를 내세워 궁궐 이름을 바꾼 데에는 광해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당시 집권세력의 뜻이 발동했었을 것이다. 이괄(李适 1587-1624)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광해가 세워놓은 경덕궁에 들어가 9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인조였음에도 그 공덕은 잊어버린채 광해가 지은 이름마저 없애려 하였으니 조잡스런 역사 훼손이었음을 기억해 두어야겠다. 창덕궁을 비원으로,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훼손했던 저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는 어린 시절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을 만나 후원을 얻어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21살 때인 1765년 이전 도화서 화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또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이전 잠저에 머무르던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의 초상을 그린 인연으로 말미암아 32살 때인 1776년 정조가 즉위함에 이 때부터 이른바 ‘왕의 화가’가 되어 남다른 삶을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군영과 관련된 인물이 베푼 어떤 행사가 열렸다. 이곳 훈련도감 소속 북일영 활터에서 활을 쏜 뒤 어영청(御營廳) 소속 남소영(南小營)으로 옮겨 연회를 열었다. 김홍도가 불려가 이 행사를 그렸는데 바로 이 <북일영도>는 그 기록화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활터와 북일영을 한 화폭에 담으려고 사선으로 화폭을 가르고 위로는 북일영을, 아래로는 활터를 배치했다. 이상한 것은 북일영 건물이 어이없이 커다란데 아마도 행사의 주인이 북일영과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그렇게 키워 잘 보이게 한 것이겠다. 하단에 활쏘는 인물들은 무술을 갖춘 이로 대개 무관이며 여기저기 섞여 앉은 세 명의 선전관(宣傳官)은 모두 노란색 초립(草笠) 모자를 쓰고 있다. 


복판에 버들가지가 휘날리는데 멀리 과녁이 뚜렷하고, 가파르게 치솟은 산자락이며, 울창한 소나무와 계곡 사이 우람한 바위가 매우 역동하는 풍경은 오늘날 온데간데 없다. 지금은 온통 옛 무비(武備)의 위용은 커녕 매연으로 흐뿌옇다. 경희궁은 일본 침략자들의 손에 거침없이 침탈당해 지금은 겨우 손바닥만큼만 남았고 또 궁궐에 잇닿아 위용을 과시하던 사직단은 초라한 폐허 그대로다. 아직 그 모습 그대로일 때 <경희궁지>를 지었던 정조는 궁궐이란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근래 지방자치단체장 따위들이 분수넘치는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있음을 보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그런 정조대왕의 당부가 있었으니, 어리석은 관료를 향한 호령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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