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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혜화문 밖 꽃장수

최열

복사꽃 시내 한 줄기는 제 몸을 감추었고 桃溪一帶隱河身

봄날이라 저자에는 물쑥, 돼지 널려 있네 蔞菜河豚小市春

혜화문 밖에는 수레와 말 적은데         惠化門外車馬少

빗속에 이따금 꽃 파는 이 보이네        雨中時見賣花人


- 박제가, <장경교(長慶橋) 절구(絶句)>, 『정유각집(貞㽔閣集)』



노원에서 종로로 갈라치면 월계를 지나 되너미고개[狄逾嶺]를 넘어 혜화문(惠化門)을 지나쳐야 한다. 1990년부터 노원에서 살기 시작했던 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스무 해동안 그 길을 다녔다. 처음엔 혜화문이 없었다. 1994년 도로 옆 성곽에 석문을 내고 그위에 문루를 세우고서야 내가 다니던 그 길에 그 문이 있었음을 알았다. 혜화문은 모두들 동소문(東小門)이라 불렀는데 이 문이 없어진 때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먼저 조선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1928년에 문루가 퇴락했다며 철거했다. 이 문루는 1744년에 어영청(御營廳)에서 건축한 건물이었으므로 2백년이 흐르며 자연스레 퇴락하였으니 보수하면 그만인 것을 아예 파괴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십 년이 지난 1939년에는 다시 석문조차 철거하고 시원스런 도로를 뚫어버렸다. 교통의 효율을 높이는 조치였지만 산줄기를 흐르는 기운을 끊는가 하면, 조선왕조의 흔적 지우기에 열광했던 일본의 야만스런 소행임엔 틀림 없다.


50년만에 복원한 이 혜화문 또는 동소문은 어떤 문인가.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즉위한지 세 해만인 1394년 10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서 궁궐과 성곽 공사를 독려하여 1396년에 모두 완공했는데 도성을 둘러싼 성곽에는 네 개의 대문과 그 사이네 개의 소문을 뚫어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도로를 갖추었다. 이 때 함께 만든 동소문은 완공 당시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는데『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보니 1511년에 혜화문으로 고쳐 불렀다. 혜화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국토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6대 간선도로(幹線道路) 가운데 하나였다는데 있었다. 혜화문을 통해 한양에서 동북쪽으로 의정부를 거쳐 함경도 경흥에 이르는 제2대 간선도로 관문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을 항상 닫아두었기 때문에 동소문은 북대문의 역할을 함께 아울렀던 게다.


혜화문 밖으로 나가면 성북에서 세 선녀의 놀이터나 세 화랑(花郞)의 훈련터인 삼선(三仙)을 거쳐 돈암, 안암으로 흐르는 냇가를 따라 마을이 널리 펼쳐져있고 또 이제구(李齊九)란 사람의 말처럼 개울이며 숲이 ‘서로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다’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뽕나무며 복숭아에 능금밭이 냇물을 따라 구비 구비 즐비하였고 또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여 온갖 새들이 제집인냥 모여들던 평화로운 땅이었다. 그래서 혜화문 석문의 위쪽 둥근 월단(月團) 천정에 봉황(鳳凰)을 그려놓았다고 한다. 다른 대문과 소문에는 모두 용(龍)을 그렸었으므로 이 문에만 남달리 봉황을 앉힌 뜻이야 아마도 새의 왕 봉황으로 하여금 군림하여 다스리고자했던 것일 게다. 그리고 혹 모를 일이다. 지금 돈암에서 미아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 이름이 저 병자호란 때 여진족(女眞族)인 ‘되놈(오랑캐)’이 침입해 온 고개라고 해서 되너미고개 또는 적유령(狄逾嶺)이라 불렀으니 오랑캐와 봉황이 무슨 상관이라도 있을지는.


정선(鄭敾, 1676-1759)은 69살 때인 1744년 혜화문에 문루를 세우는 모습을 보았을 터인데 정작 <동소문>에 문루를 그려넣지 않았다. 1744년 이전의 모습을 그린 셈인데 지금과 달리 높고 험한 고개 위에 성문을 배치해 두었다. 일본 사람들이 도시계획 한답시고 고개를 헐어내고 평지를 만들어 높은 산성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그림을 보노라면 북한산에서 낙산(駱山)으로 흐르는 줄기의 흐름 이어지는 모습 그대로다.


혜화문 안으로 굽어들면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네 거리를 만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거리는 고가도로에 갇혀 제 모습 잃어버린 채였지만 1929년 12월 9일 이곳은 역사의 거리였다.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한 경신학교 학생 300명이 광주학생 지원연설 직후 교문을 나와 저 네 거리로 진출하자 곧 이웃 보성고보 학생 400명이 합류해 종로 진출을 목표로 1대는 지금 대학로의 경성제대, 2대는 창경궁을 향해 행진하였고 일부는 창덕궁 뒷켠 중앙고보학생 400명과 합세하였다. 오랑캐 침입 300년 뒤 또 다른 오랑캐 일본이 동소문을 파괴한 다음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성균관과 가까운 곳 도성에 아름답기 으뜸인 돌다리 장경교(長慶橋) 근처 요란한 시장터를 거닐던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어느덧 혜화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삼선에서 성북으로 오르며 마주친 꽃파는 매화인(賣花人)을 보고 문득시 한 수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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