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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동대문 밖 관왕묘

최열

저 왜국 평정하여             靖卉桑

우리 동쪽 되찾아주셨기에  重奠吾東

이제 우리가 평안해졌으니  維藩小康

그 높은 훈공 어찌 잊으리  勛敢忘

  

- 허균, <관우송시(關羽頌詩)>,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아차산(峨嵯山)에 용마가 숨쉬던 용마봉(龍馬峰)으로 꿈틀대는 산줄기 아래 들판에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어 이곳을 면목동(面牧洞)이라 하였다. 내가 스물다섯 해 전 이곳에 살던 때엔 언제나 서쪽 중랑천을 건너 청량리를 지나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동대문을 뚫고서야 시내로 접어들수 있었다. 면목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아이도 얻고 제법 살림살이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그뒤로 절망과 희망이 끝없이 엇갈리며 고난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못 견뎌서였을까. 내시(內侍)의 무덤터인 초안산앞 사슴내가 흐르는 창동으로 옮겨왔고 비로소 이곳에서 수난을 겪고서야 고통의 시절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게다. 지금도 면목이며 동묘를 지나칠 때면 그 시절 기억이 아련한 전설처럼 가슴시린 아픔으로 되살아난다.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이란 이름을 갖춘 수도 한양의 동쪽 관문이다. 태조 이성계가 1396년 9월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육백년 제 모습을 견디고 있는데 그모습이 정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니 지나칠 때면 역사의 향기 그대로 그윽하련만 감싸고 있는 주위 풍경이 너무도 혼잡스러워 감흥은 커녕 애처로운 아픔은 나만이 느끼는게 아닐 게다.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 말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 단선 궤도를 준공하였지만 이때까진 동대문양쪽성벽은 의연히 이어져있어 수도를 방어하는 위엄 그대로였다. 그러나 1907년 박제순이며 이완용 따위 친일분자가 포진한 내각이 7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던 바로 그 때 양쪽 성벽을 철거하여 홀로 외롭게 만들고 말았다. 이에 비해 동관왕묘는 옛모습 그대로다. 묘의 주인 관우(關羽)는 후한(後漢)의 장수인데 공자의 묘를 문묘(文廟)라고 하고 여기에 대응하여 관우의 묘를 무묘(武廟)라 할만큼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이름이 높아만갔던 인물이다. 


관우의 첫번째 사당인 남관왕묘는 1598년 4월 명나라 장군 진린(陳寅)이 왜란에 관우가 나타나 승전할 수 있었다하여 남산 기슭 용산구의 복숭아골에 건축하였고 두 번째 사당인 동관왕묘는 1596년 명나라 신종황제가 건립을 요구하는 조서와 함께 보내온 관왕묘 건립기금 4천 금으로 1602년 봄에 준공한 것이다. 이 무렵 경북성주(星州)와 안동(安東)에서도 관왕묘를 세웠는데 모두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던곳이다.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관왕묘 설치명령받아 든 허균(許筠, 1569-1618)은 선조(宣祖)에게 허락을 얻어 동대문 밖 평지에 쌓아 만든 조산(造山) 근처에 건설을 추진하였다. 본시 이 조산은 성 밖 연못인 동지(東池) 뒤에 땅이 낮고 습하여 방비가 허약함을 보충하려한 봉우리였다. 허균은 동관왕묘 비명(碑銘)인 「관왕묘비」란 글에 공조(工曹)에게 지시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오고, 야철(冶鐵)하는 기구와 기와굽는 기구 및 기술자를 모아 일을 착수하였으며 1600년 겨울에 시작해 1602년 봄에 완공했는데 백여간에 이르는 건물 내부의 소상(塑像)이며 그림같은 시설 모두를 중국의 형식을 따르게 한 다음 크게 낙성식을 하였다고 기록했다.


1746년 71살의 정선(鄭敾)은 동대문에서 동관왕묘를 지나 멀리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논밭인 전농동(典農洞)이며 용과 말이 뛰놀던 용마봉을 그린 <동문조도(東門祖道)>를 그렸는데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도로의 신에게 올리는 의식인 조도(祖道)를 기념하려고 했던 것같다. 그림에 동대문 성곽 행렬이 아름답고 그 양옆으로 펼쳐놓은 집들이며 논밭과 연못이 그 시절 사람살이 내음을 전해주는데 남쪽으로 뻗어내린 성벽에 둥글게 뚫어놓은 다섯 개의 오간수문(五間水門)이 한껏 멋을 내고 있거니와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놓은 청계천만이 살풍경스러울뿐이다. 오간수문 바로 아래 청계천변은 1898년 전차 개통과 더불어 동대문발전소를 세웠었던 땅으로 전차가 다니던 1968년까지도 전차 차고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온통 시장터로 변해버렸다. 그림 속을 거닐면 떠오르는 추억이야 수도 없겠지만 동대문 밖 바로 왼쪽 복숭아며 앵두나무가 늘어선 낙산(駱山)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사이 자리잡고 있던 상춘원(常春園)이 어른거린다. 


상춘원은 1912년 천도교단이 구입한 곳으로 1919년 1월 오세창, 권동진이 교주 손병희와 함께 모여 독립운동을 계획한 3.1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였다. 또한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전위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응징한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열사가 태어난 집이 상춘원과 동대문 사이에 있었으니 왜적을 물리친 관우의 신령이 동묘에서 살아나오신게 아닐까. 그러므로 관우를 기리는 허균의 송시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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