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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경복궁 밖 남대문(南大門)

최열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 직책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요, 적신(賊臣)이 황명(皇命)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命)을 받을 수 없다.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 박승환, <유서(遺書)>



대은암(大隱岩)에서 샘이 솟아나와 경복궁 서쪽으로 흘러 냇가를 이루었는데 이 냇가는 또 삼청동에서 시작해 경복궁 동쪽으로 흐르는 물과 만나 지금의 동십자각(東十字閣)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갔다. 정선의 <은암동록>은 바로 그 대은암 동쪽 기슭에서 경복궁 담장 넘어 양쪽으로 펼쳐진 남산과 남대문을 바라보고 그린 작품이다. 하단 뜰에 네모난 바위가 있고 오른쪽 산기슭 아래 굴뚝같은 두 개의 기둥이 서 있는 모습도 이채로운데 긴 담장이 늘어선 너머엔 소나무가 울창하다. 어디 그뿐인가. 멀리 남산 꼭대기엔 소나무가 외로이 솟아있고 남대문 너머 한강 저편의 관악산이 희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화폭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담벼락이다. 이 담장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두 군데가 허물어진채 방치되어있는 까닭이다. 왜 허물어졌던 것인가.


1592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질풍처럼 북상해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다. 일본군대가 입성하여 처음 경복궁에 침입할 당시 종군한 일본인 석시탁(釋是琢)은 『조선일기』에 경복궁을 “북악(北岳) 아래 남면한 자궁(紫宮)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고 묘사하고서 “진정 다섯 발자욱마다 한 루[一樓]가 있고 열 발자욱마다 한 각[一閣]이라, 곽랑(廓廊)이 빙둘러있고 첨아(簷牙)는 높게 조각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무슨 전(殿)이고 어느 것이 무슨 각(閣)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 장엄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에 감탄을 감추지 못한 석시탁은 또 “이 곳이 용계(龍界)인지 선계(仙界)인지 보통사람으로서는 볼 수 없는 곳이다”라고 그려놓았다. 그 뒤 1593년 4월 19일 한양을 버린채 남쪽으로 후퇴할 때 일본군은 남산쪽 일부를 제외한 도성 전역에 불을 질렀음은 물론 경복궁마저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한양을 수복한 선조일행은 황량한 경복궁을 버리고 창덕궁으로 가야했다. 그로부터 150년 뒤 정선이 그릴때에도 여전히 경복궁은 담벼락과 소나무만 무성한 숲이었는데 고종이 1865년 4월부터 1867년 10월까지 복원할 때까지도 마찬가지로 살벌한 풍경 그대로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1910년경 술늑약(庚戌勒約)으로 조선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경복궁 4,000 여 칸을 헐어내고 또 1917년에도 숱한 전각을 헐고서 겨우 근정전이며 경회루를 비롯한 몇 개의 건물만을 남겨둔채 복판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드높이 지어, 백악과 궁궐 모두를 뒤켠으로 몰아 가려버렸다.


저 멀리보이는 남대문은 남쪽을 상징하는 문자가 예(禮)이므로 숭례문(崇禮門)이란 이름을 갖추었는데 도성의 정문으로 어떤 문보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어서 뒷날 국보 제1호로 지정하였다. 그 이름 ‘숭례문’을 세종의 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멋진 글자로 새긴 현판(懸板)을 세로로 세운 까닭은 화재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불을 뿜는 화산(火山)이므로 남대문이 불기운을 막는 역할을 해야 했으므로 관악산으로 하여금 경의를 표시하도록 세로로 세운 것이고 또 나아가 경복궁 앞에 물을 뿜는 해태(海陀)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2006년부터 광화문을 다시 짓는다고 해태상을 가려버린 2008년 2월 관악의 불기운을 견디지 못 한 채 순식간에 타오르고 말았다.


임진왜란 직후, 일본군대가 떼버린 현판이 남대문 밖 청파동만 초천(蔓草川*넝쿨내) 아래 배다리[舟橋] 웅덩이에서 찾아걸었던 일도 이젠 추억이라 영원히 양녕대군의 글씨를 볼 수 없어졌으니 가슴이 저려온다. 가슴 시린 이야기는 더 있다. 일본 통감부(統監府)가 압력을 가해 1907년 8월 1일 훈련원에서 조선군대를 해산함에 정부의  해산명령을 거부한채 해산식에 참석치 않은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이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대대장실에서 권총자결을 감행하였다. 이를 지켜 본 장병이 소식을 전하니 격분하여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봉기를 개시하였다. 제2연대 제2대대도 함께 봉기하여 남대문 일대를 무대로 일본군대와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하여 비록 200여 사상자를 냈지만 적군에게도 100여 사상자를 냈으며 전투 참가자는 그 뒤 의병(義兵)으로 전환함으로써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 날의 무장봉기로 말미암아 전적지로 변모한 남대문 일대의 기억이 불편했을 통감부는 1908년 일본 황태자 방문을 핑계삼아 철거하고자 하였고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남쪽 성벽을 파괴해버려 외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남대문 곁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노라면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저 박승환 대장의 사자울음 소리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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