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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창덕궁에서의 잔치, 경진준천(庚辰濬川)

최열

이룸은 자식처럼 찾아왔지만            成是子來

뚫음 또한 임금의 힘이라                鑿亦帝力

소통하고 이끄는 것을                    疏通導達

가히 나라 다스림에 적용할만 하구나  可推爲國


- 채제공, <준천제시(濬川題詩)>, 『어전준천제명첩』



<영화당(暎花堂) 친림사선도(親臨賜膳圖)>는 그 많은 기록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서 그런가보다 덮어버리면 그만이겠으나 잠시 호기심을 품는다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금세 알 것이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하는 가운데 내력을 살피고 뜻을 새기노라면 자연 즐겁고 그렇게 보다 보면 사물 묘사와 구도, 색채 마저 눈에 쏙 들어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기록화는 되풀이 보아야 한다. 첫 눈에는 결코 무슨 모임인지 알 수 없고 제목을 살피는 가운데 함께 연결된 제발(題跋)을 읽어 그 내용을 샅샅이 확인할 때에야 내력을 알 수 있으므로 두고두고 새김질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는 이는 처음엔 그저 싫증을 내는데 게다가 색채나 구도, 묘사와 같은 형상마저 시원치 않으면 아예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건 기록화, 역사화의 특성이다.


<영화당 친림사선도>가 바로 그 전형이다. 영화당에 몸소 나와 선물을 베푼다는 뜻인데 다름 아닌 영조대왕(英祖, 재위 1725-1776)께서 나오셨다. 기록화에 군주의 형상을 그리지 않는 전례에 따라 텅 빈 어좌(御座)만 그려 두어 보는 이의 눈으로야 영조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일월오봉(日月五峯)을 그린 병풍이며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 자리에 마치 그가 투명인간이기나 한 듯 의연 버티고서 호령하는 왕을 상상해도 좋다.


1760년 4월 16일, 영조는 왜 이런 모임을 개최한 것일까. 무려 5만 명의 인부와 15만 시민을 57일 동안 동원한 대규모 토목공사인 경진준천(庚辰濬川)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경진준천은 조선의 도성인 한양 역사에서 대단한 사건이었다. 지금 청계천(淸溪川)이라 부르고 있는 조선 한양의 개천(開川)은 1412년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제방 축조, 교량 및 호안 그리고 준설 공사를 대규모로 실시하였던 이래 거의 그대로 방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늘어난 시민들이 오염물 투기하기를 계속하다보니 300년이 흐른 18세기에 개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최악의 하수로 전락해 있었다. 물길이 내리는 대로 흙, 모래 따위가 쌓여 천변 도로와 그 높이가 같아졌고 장마가 질 때면 썩은 물이 넘쳐들어 주변 일대 가옥과 인명의 피해는 끝 가는 줄 몰랐다. 워낙 궁궐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영조가 이런 상태를 주목해 고치고 싶었으므로 공사를 일사천리로 밀어붙여 모든 시민의 찬사가 그치지 않았다. 영조 스스로도 훌륭한 일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 기특했던지 잔치를 열었다. 당상관과 비변사 낭청(廳) 및 그 아래 준천사 인원 모두를 불러 모았다. 잔치가 열린 이곳 춘당대(春塘臺) 일대는 주합루(宙合樓) 아래 춘당지가 한 가운데 있고 부용정(芙蓉亭)과 영화당이 동서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창덕궁 후원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1405년 10월에 조성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일본군이 파괴해버려 폐허가 되었다가 선조(宣祖)와 광해(光海)가 재건했지만 다시 인조정변(仁祖政變) 때 정변군대가 불을 질러 다시 폐허가 된 것을 인조가 1647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1917년에도 화재가 일어나 또 폐허가 되자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전각을 철거하여 1920년에 재건하였다.


그림을 보면, 군주가 자리한 곳 차일(遮日) 뒤쪽 큰 기와지붕 건물이 영화당인데 왼쪽으로 치솟은 한그루 소나무와 오른쪽 길게 펄럭이는 교룡기(交龍旗)가 군주의 위용을 상징하여 아름답다. 한껏 흥이 오른 영조는 스스로 력(力)과 국(國) 두 글자를 운(韻)으로 삼아 “지금 준설을 이룩함은 신민이 온 힘을 다함이다. 모름지기 이 정성을 국가에 바쳐야 하리라”라고 읊조리자 이를 들은 당상관, 낭청 27명이 ‘력, 국’ 두 글자 운을 따라 시를 지어 올렸다. 일순 뜨거운 기운이 넘쳐흘러 궁궐 일대를 뒤덮었을 것이다. 민인과 국가, 군주를 찬양하는 노래 가락이 진동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잔치에 참석한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하려는 영조의 뜻을 반대한 강직한 신하였다. 여지없이 이 잔치에서도 폐위 반대 의지를 담은 시를 지어 바쳤고 영조는 도리 없이 명령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두 해 뒤인 1762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여 버렸다. 뒷날 이를 후회한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써 세손 정조(正祖)에게 이르기를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군주의 뜻조차 거스른 채제공의 그 노래 들을 수 있으려면 수도 없이 그 그림 되풀이해 볼 일이다. 역사를 뒤적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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