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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안개 낀 세종로, 사헌부의 위엄

최열

봄바람이 푸른 대와는 본래 아는 처지라      春風識面碧琅玕

아이들 자라나 비단 죽순 알록달록         生長兒孫錦籜斑

십년 세월 돌아갈 흥취를 저버리니         辜負十年歸去興

때로 그림 속 단란한 모습 보기마저 부끄러워라   畫中時愧見檀欒


- 서거정, <제춘죽도(題春竹圖)>, 『사가시집(四佳詩集』 제5권



오늘날 언론은 어떠한가. 너무도 지나치다. 근래 민주주의 국가를 뒤집어엎고 전제군주처럼 군림하였던 인물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하는 내용을 방송하겠다는 공영방송도 있고, 게다가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가며 수 만년 세월을 유유하게 흐르던 강을 파헤치고 제멋대로 두들겨 막아댐으로써 국토 자연을 파괴하는 인물이 버티는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눈감는 신문사, 방송사가 대부분이다. 심하고 또 심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감찰기관이자 언론기관의 하나인 사헌부(司憲府)는 “행정을 검사하고, 백관(百官)을 사찰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며, 외람되고 헛된 행위를 금지하는 일을 관장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大司憲)을 맡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9)은 『제좌청기(齊坐廳記)』에서 나라가 사헌부 관원을 잘못 만나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과 같아, 귀는 막은 것 같고, 눈은 손으로 가린 것 같으며, 입은 자갈을 물린 것과 같다”고 하고서 감찰 및 언론의 사명을 준엄하게 설파하였다.


“어사(御使)에 바른 사람을 얻으면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 때, 그 비위를 거슬리고, 우뢰같은 위엄에도 항거하여, 도끼에 죽음으로 답하는 것도 사양하지 아니하며, 장상대신(將相大臣)에 허물이 있으면 규탄하여 바로잡고, 종실(宗室)의 귀척(貴戚)으로 교만하고 간악하면 탄핵하고, 간사한 소인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반드시 쫓아내고, 뇌물질한 자가 관에 있으면 반드시 물리치고, 정직한 사람은 들어 쓰고, 바르지 못한 자는 버리고, 바르게 하며 탁한 물을 헤쳐내며, 맑은 물은 들추어 올리고, 낯빛은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모든 벼슬아치가 두려워하도록 하니, 그 직책이 어찌 중하지 않은가.”


참으로 그렇다. 오늘의 감찰 및 언론은 국가의 일에 결함이 있고, 백성이 근심으로 넘치는데도 제 몸이나 챙기고 돈벌이나 해보자는 욕망으로 귀 막고, 눈 감고, 입 닫았다. 지난날엔 그러지 않았다.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사헌부 관원인 감찰(監察)은 “그 전부터 검소하기에 힘쓰고 무명으로 만든 홍단령(紅團領)을 입고 둔한 말과 헌 안장을 타고 다녔다”고 하여 언론인이 얼마나 스스로의 행실에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거니와 지금의 언론인들은 어떠한가. 심하고 또 심하다.


<총마계회도(馬契繪圖)>는 1591년 2월 어느 날 사헌부 관원을 역임했던 24명이 사헌부 건물에 모여 시를 읊는 잔치를 벌인 일을 기념해 도화서 화원으로 하여금 기록화를 그리게 한 것이다. 백악산 아래 경복궁 근정전 지붕이 보이는데 그 아래쪽 건물이 곧 사헌부다. 그러니까 사헌부와 경복궁 사이는 육조(六曹)거리라 불렀던 지금의 세종로(世宗路)인데 안개가 가려 신비롭기만 하다. 사헌부는 지금 경복궁 앞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선 곳으로 그 위엄이 자못 삼엄했다. 하단에 보이는 출입문은 정부종합청사 뒤켠 길로 난 후문일 것이고, 그 앞 냇가는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옥류천(玉流川) 줄기일 것인데 멀리 백악산의 찌를듯한 위세와 감찰관을 맞이하는 백성의 납작 업드린 모습이 사헌부의 권위를 말해 주고 있다.


당대 지식인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론의 시비를 격렬하게 전개할 즈음, 전란의 운명으로 나아가기 직전 감찰이 된 이들은 모임에서 그 시대를 논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참가자 24명 가운데 장지현(張智賢, 1536-1593)은 1590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 1546-1592)의 부장(部將)이 되었다가 1591년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이 때 함께한 이정회(李庭檜, 1542-1613), 이형남(李亨男, 1556-1627)은 장지현과 더불어 다음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의병으로 나서 모두 눈부신 활약을 남겼는데 특히 장지현은 1593년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청북도 황간(黃澗) 추풍령(秋風嶺)에서 적을 요격하던 중 일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군사의 협공을 받아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중 장열하게 산화하였다. 유인길(柳寅吉, 1554-1602), 조응록(趙應祿, 1538-1623)과 같은 인물 또한 감찰 출신으로 전란 중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장지현은 사후 영동 화암서원(花巖書院), 유인길은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그들보다 한 세기 앞서 눈부신 감찰관원이자 언론인이었던 서거정의 노래 듣노라면 참된 감찰인이며 언론인이 더욱 그립고 또 그리워 어쩔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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