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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학로, 젖과 꿀이 흐르는 타락산

최열

흔쾌히 성 밖 모임을 이루니           欣成郭外會

어찌 마을 남쪽 약속을 돌아볼까        寧顧巷南期

술을 따르니 호쾌한 정 남아있고       酌酒豪情在

시를 들으니 잘 생각도 게을러지는구나   聽詩睡思遲


- 강세황, <우연히 만남[會]>, 『표암유고(豹菴遺稿)』 3권



한양 동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줄기가 있다. 이곳 아래는 고려 때부터 동촌(東村)이라 하였는데 오늘날 대학로(大學路)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동숭동(東崇洞) 뒷산이다. 낙타의 등을 닮았다고 해서 곱사등 타 (駝), 낙타 락(駱)이란 이름을 붙여 타락산 또는 낙산이라 했는데 그렇게 뾰쪽한 봉우리도 없이 밋밋한 곡선뿐이어서 어딘지 의심스럽다. 가장 높은 곳이 기껏 125m였다. 그래서 낙타를 닮았다기보다는 이곳 산기슭에 궁궐 우유를 취급하는 우유소(牛乳所)가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말이 더욱 그럴 듯하다. 실로 타락산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높지도, 깊지도 않은 산인데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즐비하고 그 사이에 물줄기 맑게 흘러내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가 짙푸른 낙토(樂土)였던 것이다.


이곳 일대에 두 줄기 냇물이 흘러 그 마을을 쌍계동(雙溪洞)라 하였는데 앞으로는 쌍시내의 물과 돌이 아름답고, 뒤로는 바위와 나무가 어울려 울창하고 또한 계절마다 멋진 꽃나무가 많았으므로 사람들은 한양에서 경치 좋기로 다섯 곳[漢陽五境]을 꼽으면서 쌍계동을 세 번째 자리에 두었다. 첫째는 삼청동[一三淸], 둘째는 인왕동[二仁王], 셋째는 쌍계동[三雙溪], 넷째는 백운동[四白雲], 다섯째는 청학동[五靑鶴]이 그곳이다. 삼청은 북악산, 인왕과 백운은 인왕산, 청학은 남산, 쌍계는 타락산 기슭이니까 동서남북 도성사산(都城四山)에 명승이 고루 퍼져 있었던 것이겠다.


그러므로 이곳엔 숱한 인물들이 찾아들어 계곡과 수풀 사이를 파고들어 누각이나 정자를 짓고 한가함을 누려왔다. 14세기 좌의정 박은(朴訔, 1370-1422)의 백림정(栢林亭)부터 20세기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이화장(梨花莊)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었다. 큰학자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계일정(戒溢亭), 부마 남치원(南致元)의 송월헌(松月軒), 풍류객 김유(金紐, 1420-?) 또는 참판 김인(金)의 쌍계재(雙溪齋), 홍문관 교리 이재(李梓, 1606-1657)의 협간정(夾澗亭),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의 조양루(朝陽樓),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 이심원(李心源)의 일옹정(一翁亭), 그리고 당대 문장의 권력 신광한(申光漢, 1484-1555), 군수 남상문(南尙文, 1520-1602), 우의정 이완(李浣, 1602-1674), 독립운동가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낙산은 무엇보다 물이 유명했다. 백동(栢洞)우물이며, 어수물(御水물), 동숭동약수(東崇洞藥水)가 즐비했는데 백동우물은 박은의 백림정터 옆에 큰우물로 우물 옆에 연당(蓮堂)이 있어 연당우물이라고도 했고, 어수물은 물맛이 달고 시원해 한양 제일이라 성종(成宗)이 길어다 마셨으므로 벽돌로 우물을 쌓고 어정(御井)이라 불렀으며, 성종은 사위 남치원에게 이 우물을 하사했다고 해서 우물 돌에 ‘사정(賜井)’이라는 글씨를 새겨두기도 했다. 그보다는 못해도 동숭동 약수는 배탈 난 데, 이화동약수(梨花洞藥水)는 배탈과 눈병에 특효가 있어 한양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광한이 살던 집 뒤 바위와 우물이 있는 곳을 신대(申臺) 또는 신대우물이라 하였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란 이름을 얻기조차 했다.


18세기 예원의 총수 강세황 (姜世晃, 1713-1791)이 이곳을 비켜갈리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 신대명승을 찾은 강세황은 그 신대 바위에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자를 새겨 두었다. 강세황이야 예술가이니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이수광(李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이곳 타락산에 대해 “고려 때 도선(道詵, 827-898)의 도참(圖讖)을 믿고 한양에 오얏나무[李花]를 많이 심어서 땅의 기운[地氣]을 눌렀다. 그러므로 종리촌(種李村)이란 이름도 있었다. 옛날 한양 동촌을 혹은 양류촌(楊柳村)이라 하였는데 여염에서 이 말이 널리 쓰였다.”고 하였다. 결국 왕씨(王氏)를 누르고 오얏나무 이씨(李氏)가 반역에 성공했거니 이성계의 나라는 이곳 오얏나무 씨앗을 머금은 한양의 좌청룡(左靑龍) 낙산으로부터 그 기운을 흠뻑 받은 것이다. 또 뒷날 임시정부로부터 탄핵당한 이승만이 해방 뒤 귀국해 이곳 낙산 아래 이화정을 차지한 뒤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제멋대로 뒤흔든 전제군주가 되었으니 반란의 기운 너무도 드셌던 것일까.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일찍이 동인당(東人黨)과 서인당(西人黨)의 출현을 예언하고서 한양의 동서 두 산을 빗대어 그들의 운명까지 밝혀놓았다. “동쪽은 낙산(駱山), 서쪽은 안현(鞍峴)을 말하는 바, 반드시 붕당(朋黨)이 생길 것인데, 낙(駱)은 따로 각(各), 말 마(馬)이니 동쪽을 주장하는 쪽은 당이 각각 나뉘어질 것이요, 안(鞍)은 혁명 혁(革), 편안 안(安)이니 서쪽을 주장하는 쪽은 혁명으로 안정을 얻을 것이다.” 실제로 서인당은 인조정변(仁祖政變)을 일으켜 집권 삼백년을 누렸지만 동인당은 사분오열로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다. 지금 대학로가 연극의 거리라 하지만 젖과 꿀 흘러 온통 먹고 마시는 유흥가로 타락했음을 모르는 이가 없다. 동인당에서 갈라지고 또 갈라진 소북당(小北黨)이 탄생시킨 눈부신 예술가 강세황이 이곳 낙산 아래서 읊은 노래가 서글픈 것은 그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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