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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노적봉, 별유천지

최열

한양 삼각산 푸른 하늘 닿았는데     漢陽三角際靑天

노적봉은 석름봉 같다고들 하네     露積峰如石廩傳

쌀창고 채워놓고 모두 웃고 노래하니  積廩四方謌笑裏

입춘첩 새로 쓰며 풍년 기원하노라   立春新帖願豐年


- 정조대왕, <차석름봉운(次石廩峰韻)>, 『홍재전서(弘齋全書)』 7



북한산에 숱하게 솟은 봉우리 가운데 주인은 가장 높은 세 봉우리로 백운대(白雲臺), 인수봉(仁壽峯), 만경봉(萬景峯)이다. 이들 셋이 뾰쪽한 뿔 같아 묶어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렀다가 언젠가부터 북한산이라 하였는데 어디 북한산 그 넓은 터전에 세 봉우리 뿐이겠는가. 세 봉우리 남서쪽에 노적봉(露積峯)은 꽉 채운 덩어리가 우뚝 솟아 오른듯 장엄하다. 1711년부터 무려 30여 년 동안 팔도총도섭(八道都摠攝)으로 전국 승군(僧軍)과 불사(佛事)를 지휘, 감독한 승려 성능(聖能)이 머물던 곳이 바로 노적봉 아래 중흥동(中興洞)이다. 성능이 1745년 11월 『북한지(北漢誌)』를 탈고한 곳이 그곳 중흥사(中興寺)일 텐데 그토록 오랜 동안 머물며 지켜보던 모습을 “우뚝 솟은 기이한 형상 몇만 겹인가[疊疊奇形幾萬重] 구름 속에 솟아나온 푸른 연꽃 같구나[雲中秀出碧芙蓉]”라 하였으니 성능은 푸른 연꽃 속 삼십 년 세월을 누렸던 게다. 이렇게 노래한 이가 어디 성능 뿐일까.


조선중기 문장사대가의 한 사람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월사집(月沙集)』)에 노적봉 꼭대기에 올라 “뜬구름 흐르고 해 떨어질 제 아득한 은하계(銀河界)”로부터 중국과 제주를 보았는데 “눈의 힘이 다해 더 이상 먼 곳을 볼 수 없지만 바라보이는 형세 끝이 없다”고 하였다. 노적봉이 그렇게 컸던 모양이다. 또 이정귀는 노적봉 봉우리에서 도성 일백만 호에 이르는 집들에서 밥 짓는 연기 내뿜는 것을 보고서는 그만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고 했다. 또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노적봉을 마주 보며 『동명집(東溟集)』에 노래하기를 “폭포수는 거품[瀑沫]과 더불어 일천 척을 흐르고, 구름 그늘[雲陰]은 일만 겹 맺히니, 속세 바깥으로 벗어나 혹여 신선의 짝[仙侶]을 만나지나 않을까” 기대한다 했다.


산수풍경은 이렇게 아름답지만 그 안을 경영하던 사람들 자취는 곱지만은 않았다. 땅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끝없이 이어져 왔는데 한반도 중부 서해안의 전략 요충지였던 것이다. 멀리서 보면 치솟은 산봉우리뿐이지만 그 봉우리 능선을 따라 산성(山城)이 빙 둘러싼 성안 쪽엔 중흥동이라는 동네가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산성을 조선시대 때는 북한산성이라 하였고 예전엔 중흥산성(中興山城)이라 하였었는데 중흥산성은 노적봉 산등성이에 쌓은 것이었다. 산 속의 성곽 안에는 군주가 머물 수 있을 궁궐인 행궁(行宮)을 비롯해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훈련도감(訓練都監) 예하 부대가 유영(留營)하고 또 팔도 승군을 호령하던 팔도총도섭이 머물던 중흥사가 있으며 산신각(山神閣)이 백제 이래 오랜 세월 자리하고 있었을 터이므로 하늘 아래 가장 가까운 별유천지(別有天地)를 이루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성안 북서쪽에 치솟은 노적봉은 이곳 중흥동을 홀연히 제압하던 진산(鎭山)으로 튼튼하기 그지없을 장군의 위세였던 것이다. 노적(露積)이란 들판에 곡식을 쌓아둔 노적가리를 뜻하는 말인데 왜 이 봉우리가 노적봉이란 이름을 가졌던 것일까. 둥그런 생김새가 노적가리 더미와 같아서겠지만 설명이 부족하다. 노적봉이란 이름 이전엔 대개 중봉(中峰)이라 하였던 것인데 중흥동의 중(中) 자를 따서 그렇게 불러 오다가 임진왜란 때 ‘삼각산 밥할머니’ 이야기가 널리 퍼져 노적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 그 뿌리였을 것이다.


고양시 삼송동(三松洞) 숫돌고개[礪石峴]에 자리한 도화공원엔 머리 없는 지장보살 입상이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불상을 ‘밥할머니’라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왜군에 패하여 곤경에 빠졌을 적 이야기다. 의기양양하지만 목마르던 왜병 진영에 어떤 늙은 떡장수 할머니가 나타나 이르기를, 동쪽의 봉우리 하나를 가리키며 “저 노적가리에 식량 수만 석을 쌓은 채 군량미를 씻고 있어 이곳 냇물이 뿌연 것이니 쌀 씻은 물이 흘러서 그러 합니다”라는 정보를 주었다. 이에 놀란 왜병이 철수해 버렸는데 “저 노적가리”가 다름 아닌 중봉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중봉은 노적봉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염초더미’ 전설도 그러하다. 염초(焰硝)는 화약인데 우리 군대가 저 염초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다고 하여 적군의 예봉을 꺾어 버렸으니 저 백운대 서쪽 염초봉(焰硝峯)도 그렇게 얻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런 전설은 목포 유달산(儒達山)이며 경주 서면 오봉산(五峰山)에도 있을 만큼 퍼져 있었는데 사실을 떠나 전란의 승리와 평화의 염원을 새긴 것이었을 게다.


화원가문의 명가 개성 김씨가의 적자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은 1800년 7월 그믐날 저 노적봉을 그렸다. 7월이면 한창 무더운 여름날이다. 그런데 그림 속 노적봉이며, 소나무엔 눈이 쌓여 스산한 겨울날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정조대왕은 그에 앞서 김홍도가 정초에 세화(歲畵)로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8폭을 그려 올리자 그 가운데 중국 형산(衡山)의 <석름봉(石廩峰)>을 그린 것을 보고 차운(次韻)하는 시를 지었다. 주자의 원운시는 석름봉에 곳간이 가득 찰만큼 풍년이 들었다며 좋아하는 것이었고 정조의 차운시는 곡식을 쌓아 올린 조선의 노적봉을 떠올리며 풍년을 염원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정조는 이것이 너무 좋아 다시 김득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를 다시 8폭으로 그리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명을 받아 <어제팔장(御題八章)>을 그리려 준비하던 6월 28일 정조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물론 시에 담긴 내용이 입춘 때였으므로 겨울 풍경을 그렸을 테지만, 저처럼 음산한 풍경으로 그렸던 까닭은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 소식에 황망한 마음 감출 길 없어서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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