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8)청계천의 어제 그리고 내일

정중헌

열린 청계천변을 걸어본다. 맑게 굽이치는 물길이 늦더위를 식혀준다. 옛 돌과 새 돌로 복원한 광통교를 건너보고 정조대왕 능행도(陵行圖) 벽화를 따라 푸른내를 따라가노라니 이게 도심인가 싶게 서울이 달라보인다. 가슴이 트이면서 발걸음에 여유가 생긴다.

광복 이듬해 청계 4가 쪽 주교동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필자가 청계천을 걷는 감회는 남다르다. 1·4후퇴 때 피란 갔다가 열 살 무렵에 다시 찾은 청계천은 빈민굴이나 다름없었다. 개천가엔 판잣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있고 하수에 쓰레기가 범벅이 된 바닥에선 악취가 진동했다.

<중학교 다닐 무렵 광교에서 시작된 복개(覆蓋) 공사가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어나갔다. 그때는 그게 신기했고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판잣집들이 헐리고 오염된 하천을 덮어버린 복개도로에 차들이 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 위에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답답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상징이던 고가도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를 복개도로와 함께 도심의 흉물이 되어버렸다. 매연과 소음의 온상이 된 청계도로는 가뜩이나 각박한 시민들의 숨통을 죄는 애물단지였다.

그 청계로가 3년 공사 끝에 구조물들을 헐어버리고 하천의 본모습을 되찾았다. 아직 마무리가 안 됐는데도 물고기가 올라오는가 하면 삼복 더위 때는 주변 기온을 낮췄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이제 한 달 후면 맑은 물이 흐르는 천변(川邊)은 시민들의 산책로 겸 휴식처가 될 것이다.

서울에서 60년을 살아온 필자에게 청계천의 변화는 현대사의 축도가 아닐 수 없다. 가난으로 얼룩진 하천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복개되더니 얼마 안 가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산업화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청계천을 되살렸다는 것은 환경친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개발 위주이던 도시행정이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자동차 위주였던 도로를 인간 중심으로 바꾼 것처럼 청계천 복원은 늦게나마 시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다. 서울 공기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오염된 데다 인구 과밀로 뜨겁게 달궈져, 이를 식혀줄 오아시스가 절대 필요했다.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공간도 절대 부족이었다. 그걸 해결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청계천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이 치수(治水)에 힘썼던 서울의 중추였고 600년 역사가 서린 곳이다. 아낙들의 정겨운 빨래터였고 연 날리고 연등놀이하던 주민들의 휴식처였다. 그런 정취와 문화유적이 복원됐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청계천은 가꾸기에 따라서는 생활하천이던 조선시대보다 더 멋지고 풍요로운 문화공간이 될 수 있다.

청계천 복원은 세계 도시에서 유래 없는 환경프로젝트라고 할 만하다. 삭막한 도시에 자연의 바람을 불게 하고 아름다운 야경(夜景)을 빚어낸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이런 찬사보다 더 값진 것은 이런 큰일이 시민합의로 이뤄졌고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청계 고가를 헐면 교통대란이 일어나고, 상인들이 생활터전을 잃는다는 비판이 빗발쳤지만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고통을 감내한 대가로 우리는 도심에 강을 얻었고 예쁜 다리들을 건너게 되었다.

이것은 누구 개인의 공이라기보다는 우리 국민의 잠재력, 시민의 성숙한 의식을 능력 있는 리더가 잘 활용해 일군 공동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월드컵 때 보여주었듯이 우리 국민은 뜻만 모으면 못해낼 일이 없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청계천 복원의 성공은 국민들의 그런 신명을 북돋운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해질 무렵 청계천 다리 난간에 기대선 시민들의 표정이 흐뭇하고 여유롭다. 그런 작은 행복을 국민들은 바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2005.8.30 태평로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