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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화사한 축제로 그려낸 천경자 화업 82페이지

정중헌

연초에 문득 천경자 화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국 뉴욕의 큰딸 댁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건강은 어떠신지 궁금했다. 뉴욕으로 날아가 근황을 알아보고 싶은 충동도 불현듯 일었지만 우선 천 화백 관련 책들부터 보기 위해 교보문고에 들렀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일찍이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라는 자서전을 냈고, 기억나는 수필집만도 ‘한’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등 10여권에 달하는데 그 큰 서가에 한권이 없는 것이었다. 모두 절판이고 검색에 잡힌 화집도 찾아보니 없었다.
천경자 화백은 한국 현대화단을 대표할만한 여성 화가이고 전시 때마다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치는 인기 작가이기도 하다. 그 비결은 고독과 정한을 꿈과 환상으로 승화시킨 주제의 상징성, 개성 있는 색채와 조형의 인물화, 정교한 데생으로 현장감을 포착한 풍경화, 그리고 드라마 같은 작가의 삶과 작품이 여일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천 화백은 1995년 평생의 작업을 결산하는 개인전을 호암 갤러리에서 가진 후 1998년 11월 채색화와 스케치 등 93점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팬들의 곁을 떠났다. 그 후 작업이 중단됐다면 이제는 누군가 천경자 화백의 화업 전체를 조명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할 때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어느날 갤러리 현대에서 천경자 화백 작품전을 기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완성 작품과 드로잉을 중심으로 옷과 사진들도 전시하는 축제 형식의 빅쇼로 꾸민다는 것이다.
천 화백의 미완성작과 드로잉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가슴 벅차오르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완성작들은 작가의 서명만 없을 뿐 완성작 못지않은 구도와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손질을 가하려한 작가의 완벽성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500여점 중에서 가려 뽑았다는 드로잉과 현장 스케치들에 쏟은 작가의 또 다른 내면이었다. 꽃, 인물, 풍경, 새, 동물 등으로 분류되는 드로잉과 스케치들은 작가가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밑그림을 그렸으며 동식물의 특성을 일일이 데생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에서 교육받을 때 기초를 단단히 배우기도 했겠지만 천 화백은 50대 이후에도 끊임없이 데생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탄탄한 조형성을 일궈낸 것이다. 특히 꽃이나 새의 드로잉에 세세히 색깔까지 표시한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은 오늘의 미술학도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생전의 반 고흐는 원화의 밑그림이 된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는데 그 하나하나가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천 화백 역시 세계를 일주하는 스케치 여행에서 움직이는 대상을 순식간에 묘사해 내는 정확한 눈과 빠른 필력을 구사했음을 드로잉들에서 읽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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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화백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
이번에 공개되는 1950년대 천 화백의 자화상과 가족도도 눈길을 끌지만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길례언니’ 등 대표작을 다시 보는 감회도 새로울 것 같다. 천 화백은 피붙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저작권까지 위임했다. 미술품은 사회의 것인 만큼 자신의 작품이 오래 보관될 수 있는 기증을 택한 것이지만 서운함도 컸을 것이다. 뉴욕에서 천 화백을 돌봐온 큰딸 이혜선씨에 따르면 천 화백은 도미 후 한동안은 여행도 하고 그림도 그렸으나 2003년 뇌일혈을 일으켜 투병중이라고 한다. 거동은 힘들지만 정신은 깨어있어 서울전시를 한다는 말에 눈빛을 반짝이며 손까지 흔드셨다는 것이다. 천경자 화백은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전설을 지닌 작가다. 그는 일찍이 화단에서 배척받고 삶의 굴곡도 겪었지만 21세기를 내다보며 그만의 화풍을 일궈낸 예술가이다. 때로는 우주인 같은, 때로는 마녀 같은 섬뜩한 눈빛의 여인상들은 21세기를 내다본 영혼의 울림이자 천경자풍으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이해하고 진정 사랑하려면 그의 살아온 여로와 용광로 같은 창작에의 정열, 그리고 말년까지 지속된 스케치 기행의 애환을 알 필요가 있다. 왜 꽃인가, 하필이면 뱀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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