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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月田의 삶과 예술 총체적 評價 필요하다

정중헌



집 안방에 月田 선생님 작품이 걸려 있다. 어스름 달밤에 새가 날아가는 그림인데 필자가 문화부장이 된 기념으로 이름까지 써주신 수묵담채화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월전의 미소가 오버랩된다. 선비처럼 꼬장꼬장 하셨지만 웃으실 때는 아이처럼 천진스러웠다. 靜中動 - 월전은 움직임이나 행동반경이 크지 않았지만 언제나 주위를 움직이게 하는 묘한 매력을 풍기셨다.

“한잔 하시게나.”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게 米壽展을 앞둔 어느날 삼청동의 한 음식점에서였다. 90을 바라보는 노화백은 흐트럼없는 자세 속에서도 따사로운 미소로 좌중을 이끌며 대작하셨다. 그 여유, 그 剛健하심이 白壽까지 이어지겠거니 여겼는데 지금은 가고 안계시니 그리움만 쌓인다.
생전의 월전은 필자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다. 현역에서 일할 때는 취재차 뵐 기회가 잦았지만 데스크에 앉고부터는 연락을 드리지 못했는데 오히려 선생님이 가끔 안부전화를 주셨다. 寒碧園을 준공하신 후 따로 초청해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즐거워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원의 연못이며 나무 한 그루에도 월전의 안목이 배어나왔지만 결코 화려하지 않으면서 격이 있는 실내 꾸밈도 인상적이었다.
77년 초여름 인사동에 있던 월전화실을 찾았다.조선일보 문화면에 연재한 ‘産室의 대화’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옛 선비의 사랑방을 연상시킨 화실은 도심에 있는데도 산사처럼 고요가 감돌았다. 그속에서 월전은 장미를 그리고 있었다.

“잔가지도 쳐버리고 색채도 아낀, 그러면서도 풋내나지 않는 그림을 그려보려고 무던히 애쓰지만 아직은 생각뿐입니다”

동양화의 궁극적 목표를 형태보다는 정신에 두고 있다는 월전은 “군더더기를 다 떨어버리고 骨格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동양예술의 극치는 無念無想의 禪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잡념과 세속적인 것을 털어버리고 사기대접에 담긴 맑은 물같은 明鏡止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요. 손끝에 붙은 기교보다 차원높은 정신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동양화입니다.”

墨香이 은은한 화실에서 월전은 “예술은 世俗과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학문이나 예술의 길이 어렵다고 해서 세속과 타협해서는 안되며, 여러 사람의 눈치를 살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전통은 외형적인 양식이 아니고 정신에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술행동은 자기의 감정과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표현하는 만큼 우리 감각에 맞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월전은 역설했다.
3년 뒤 교보빌딩으로 옮긴 화실을 찾았을 때도 도심속의 고요가 감돌았다. 당시 월전은 현대화랑 초대전과 프랑스 정부 초청전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실을 둘러보니 문인화 계열과 花鳥도 있었지만 현대적인 소재를 형상화한 신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간 전통속에 담긴 소박함을 살려나가는 작업을 해왔지만 이번 발표전에는 현실 속에서 소재를 구한 작품도 내보이렵니다. 현실을 충분히 표현하면 그게 바로 현대작품 아니겠어요”

그때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이 휴전선의 철조망을 그린 수묵화였다. “월전께서 이런 소재를...”이라고 감탄하자 그는 “우연히 휴전선에 갔다가 철조망으로 가려진 분단의 현실을 작품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1987년 좮盤龍軒珍藏印譜좯를 펴냈을 때 월전을 인터뷰했다. 20여년 동안 수집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옛 印章들을 정선해 鈴拓하고 해설을 달아 손수 펴낸 책을 주시며 월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중에도 귀하게 얻은 충무공의 돌도장과 玉璽의 목형 원판을 아낀다는 월전은 “도장 하나로 역사를 유추할 수 있고 선조들의 풍류를 되새길 수 있다”며 古印의 사료적 가치를 역설했다. 돌이켜보면 월전과 필자는 34년이란 나이차가 있음에도 한번도 월전이 노인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연륜의 깊이에 비해 늘 젊은 생각, 젊은 감각을 잃지 않았던 분이 월전 선생님이다.
溫故知新은 월전의 일생을 관통한 話頭였다. 옛 것을 밝혀 새로운 지식과 견해를 펴고 실천한 분이 월전이다. 그런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월전하면 전통의 맥을 이은 한국화가로 기억되지만 휴전선 철조망 그림이나 線만으로 바람의 움직임을 표현한 <태풍경보>, 특히 배꼽티를 입고 휴대전화를 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신세대 여성을 그린 <단군일백오십대손>은 망백의 노화가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젊다.

월전은 한시로 畵題를 짓고 쓰는 詩書畵의 대가였지만 화제의 내용을 읽어보면 시대적 은유와 풍류가 넘쳐난다. 옛 것을 아끼되 현대를 누구보다 이해한 월전의 성품은 팔판동에 지은 한벽원과 白月빌딩, 그리고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예술강좌, ‘寒碧文叢’과 월전 美術賞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통의 정신은 살리되 후손과 후학들이 불편하지 않게 현대건축을 택했고, 자신을 기리는 사업 역시 구차스럽지 않게 제도적 장치를 해놓고 가신 것이다.
월전의 이미지를 압축하면 格이다. 人格•品格•畵格이 3위1체를 이루면서 동시에 풍류객의 낭만을 즐기고 가신 분이 월전이다. 사실 90 평생을 살면서 격을 흐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데 월전은 꼿꼿한 인품, 均齊된 화풍, 고고한 품격으로 1세기를 풍미했다. 현대인들이 건강을 돌본다고 야단이지만 월전은 90대에도 약주를 즐기면서도 五福을 누렸다.





그런 월전도 마음 고생을 한 적이 없지 않았다. 70년대 말 미술계에 그리기만 하면 팔리던 과열현상이 일었을 때 필자는 유한마담들의 屛風契 열풍을 비판한 기사를 썼는데 그 때 화가가 부인네 치마폭에 매달린 삽화가 곁들여진 적이 있었다. 월전 선생께서 전화를 걸어 예술가의 품격을 그렇게 떨어뜨릴 수 있느냐며 역정을 내셨는데 듣고보니 편집이 적절치 못했음을 알고 사과를 드린 적이 있다. 80년대 한 월간지에서 親日論을 들고 나왔을 때 월전은 심적인 고통을 받았을 테지만 그런 것들이 월전의 작가정신을 결코 깍아내릴 수 없음을 필자는 확신한다.
오히려 이제부터 월전의 眞面目을 연구하고 재조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한세기에 걸친 월전의 삶과 예술은 너무 방대하기도 하지만 세상에 나서기꺼린 월전의 성품으로 인해 빙산의 일각만이 세상에 알려진 상태다. 비평가도 많고 학자도 이론가도 많지만 월전의 정신과 畵道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연구실적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월전 회고록 좮畵壇 풍상 70년좯을 봐도 6•25전의 활동이 그 후보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전후 50여 년을 활동한 시대적 배경과 작가로의 변모를 그의 풍류와 함께 통시적으로 꿰뚫는 작업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제자들이 월전 재평가 작업을 체계적으로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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