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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TV 9시에 문화뉴스 편성을

탁계석

한 차원 높은 방송의 시각 필요
점점 신문, 방송 보기가 두려워진다. 눈만 뜨면 각종 사건, 사고 뉴스다. 심리적 불안을 가중 시키는 뉴스가 알권리 충족에 얼마나 기여를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밝고 아름다운 뉴스가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몇 해 전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어느 신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처럼 경기 침체로 불안이 가득한 가운데 11월 말쯤인가 첫눈이 내렸다. 신문 1면에 한 장의 칼라 사진이 실렸다. 수녀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천진난만하게 눈싸움을 하는 정경이다.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정화를 체험했다. 바로 예술의 기능이자 역할이다.
또 다른 예로 클래식을 즐기시는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호로비츠가 60년 만에 러시아로 일시 귀향해 모스크바 홀에서 연주 할 때였다.
이때 소련은 리비아를 폭격하고 있었다. 한 서방 기자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호로비츠의 연주 장면을 소개했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듣는 노신사의 볼에 눈물이 흐르는 장면을 잡아 클로즈업 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적이 아니었다’ 고 말했다.
이처럼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암울함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보여주는 뉴스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빛바랜 ‘문화의 달’ ‘문화뉴스’ 로 전환되었으면
그런데 우리 방송은 관행적으로 편성해 놓은 스포츠 중심의 편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편은 봄, 가을로 하지만 변화다운 변화를 볼 수 없다. 이중에서도 저녁 9시 후반에 스포츠 뉴스는 있지만 문화뉴스가 없는 것은 차별이다.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 문화를 홀대하고 있는 것이다. 계도의 기능을 가져야 할 방송에 존재하는 편견이 언제쯤 고쳐질 수 있을까. 입만 열면 지금은 문화시대라고 외치지만 뉴스의 초점에서는 영원한 변방이다.
지난 10월은 ‘문화의 달’이었다. 그러나 국민누구도 더 이상 10월을 문화의 달, 문화의 날로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문화 홍수시대여서 공급 과잉의 혼란을 겪고 있다. 문화 활성화가 안 되었던 가난한 시절의 빛바랜 포스터를 떼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문화의 달’이 아니라 ‘문화뉴스’가 더 필요한 때다. 문화가 소통될 수 있도록 양질의 문화를 알리고 문화 소비자의 선택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미술관, 연주회장에 들리는 모습을 비추거나 햇볕이 들지 않는 소외 지역에서 열리는 달동네 음악회가 서로 이웃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면 문화의 생활화에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이제 문화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도, 축하 공연도, 상을 주고받는 것조차 문화예술인들 조차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스포츠뉴스만 있는 현행 9시 뉴스에 같은 비중의 문화뉴스를 신설한다면 문화관광부의 업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문화를 보는 방송의 시각이다.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치열한 삶이요 현실이다
지금껏 우리 방송의 문화에 대한 입장은 한마디로 냉대였다.


1. 문화를 알면 안 되는 것인지(보도 제한)
2. 중요 시간대에 보면 안 되는 성인방송인지(심야방송)
3. 교양보다 개그 오락만 전파 효율성인지(개그천국)
4. 생활체육과 유리된 스포츠 스타만 필요한 것인지(스포츠 공화국)
5. 문화는 저예산 프로그램편성의 모델인지(만성적 예산타령)
6. 드라마 천국 신화는 정권 불변, 무소불위인지(국민 하향평준화 일등공신)
7. 시청률은 헌재 보다 높은 결정인지(시청률 지상주의)
8. 스포츠는 생방이 되고 예술은 땜방 인지(편성 펑크용)
9. 열린 음악회는 시도는 좋았지만 이제는 획일적 음악공급이 아닌지 (아이디어 빈곤)
10. 방송 편성자의 문화 인식(상박하후)

사실 방송의 영향력을 생각 할 때 특히 KBS와 같은 공영방송은 신뢰와 품격을 살리는 방송의 위상 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본다. 세상에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데 구태여 쓰레기 같은 것들을 골라 보여주려는 흥미위주. 자극 방송의 제작 관행이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노래’ 프로 살렸으면
예전에 ‘내 마음의 노래’란 방송의 가곡 프로그램을 기억할 것이다. 멋진 풍경의 영상을 따라 성악가의 정겨운 가창이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프로그램이 다시 살아날 필요가 있다. 각박한 세태에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노래이기 때문이다. ‘가요무대’는 있지만 ‘가곡 무대’는 없다.
미국의 노예해방을 이끄는 데는 포스터의 ‘올드 블랙 죠’ 가 큰 기여를 했다고 들었다.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가 뉴욕의 한 파티 장에서 부른 비브라토 음성의 ‘타향살이’를 들은 남유소 화백은 그가 고향에 대한 절절한 외로움을 노래를 부르며 삭혔다고 말했다 한다.
전쟁 참패의 비참한 상황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태어났다.
우리사회를 변화 시키는 힘이 개혁이란 ‘무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힘을 돋우게 하는 ‘소프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저력을 국가 에너지로 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방송이,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문화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사회화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좋은 방송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스피커 노릇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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