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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편견과 갈등의 벽을 넘어서

탁계석

얼마 전 우면당에서 있었던 ‘임준희’라는 여성 작곡가의 창작 발표회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다. 예술의 전당을 다니면서도 담 없이 이웃에 있는 국악원의 우면당은 몇 번 들리지 않은 것이다. 국악과 양악의 경계가 남북 보다 더 먼 것 처럼 느껴진다. 이런 거리감이 비단 필자뿐이겠는가. 우리 예술 대학 시스템이 그러하고 국악, 양악 교수가,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동양, 서양화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따로 따로 받은 교육, 아니 제대로의 우리 전통 교육 부재가 원인일 것이다.
임준희 작곡가는 한 해에도 몇 차례씩 국제음악제에 초청될 정도로 설득력 넘치는 음악을 생산해 내고 있다. 국악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음악과 동양 음악의 기법을 깊이 연구해 창작 음악을 만들고 있다. ‘인성과 3대의 거문고와 대금, 마림바와 타악기를 위한 <달하>라던가, 가야금과 첼로를 위한 곡들을 발표했는데 동서양 악기의 만남을 통해 주법, 기보 법, 연주 테크닉 등을 개발해 가고 있다.
적지 않은 작곡가 학생들마저 그의 음악을 충격적으로 느끼고 국악에 대한 무지가 두렵다고 했다. 서양음악의 표현이 깊어지면 결국 우리 소재를 찾게 되는데 이를 등한시하면 할수록 자기표현 영역이 좁아지고 자칫 막혀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이를테면 화선지를 이용할 줄 아는 미술학도나 화가가 얼마나 있을까.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 자기 밥그릇만 고수하는 동안 우리 미학의 국제 경쟁력은 기회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현대음악’이란 발표회 중에는 평론가인 나도 언제 끝이 나나 좀이 쑤시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눈도장 청중들은 오죽하랴. 현대미술을 보면서도 관객들이 같은 생각을 한다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유학 다녀와 강사 자리 하나 따려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창작 음악을 하고 지루한 줄서기에 청춘을 날리고 길 없는 길을 헤매는 예비 작곡가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눈치 보지 말고 다시 공부를 하던지 해서 영상, 영화 음악, 무용 음악, 게임 등 타 장르의 기능성 음악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편견이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이다.




벽을 허무는 음악가

우리 창작 1세대인 작곡가 김동진 선생은 오래전에 영화 음악을 많이 작곡하셨는데 가곡 작곡가가 그런 3류 음악을 하느냐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명곡‘저 구름 흘러가는 곳’도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 삽입된 음악이다. 차이코프스키가 발레 음악을 하자 3류 작곡가라 비난 받았던 것과 같은 예다.
이런 갈등은 종교에도 있다. 작고하신 ‘달밤’의 작곡가 나운영 선생은 우리 소재를 다루다보니 불교음악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교회 장로였던 선생이 교회로부터 받은 비난은 말할 수 없다. 일반의 눈에 비친 현실과 예술의 혼돈은 때로는 재판 과정에서도 나타나 곤혹스럽게 한다.
일전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이건용 작곡의 창작 오페라‘童僧(동승)’을 보았는데 밀도 높은 서정성과 등장인물의 내면적 심리 묘사가 잘된 미학적인 작품인데 성공회 신도인 작곡가가 불교 내용을 깊이 있게 파고든 것을 보면서 편견의 벽을 허무는 사람은 결국 능력 있는 예술가란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다.
이런 점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만능 재주꾼인 임동창은 벽허물기의 원조 격이다. 서양의 피아노가 그에 이르면 놀기 좋은 타악기로도 변신을 하는 것이다. 그가 쇼팽을 또 얼마나 잘 치던가. 우리 피아노 사를 쓸 때 그를 빼고 쓴다면 당연히 역사 왜곡이라 할 만하다.
운이 없었던 나로서는 장사익의 음반을 들은 것이 겨우 지난해였다. 지인이 나의 양평 시골집에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들려준 것이 바로 그의 첫 앨범이었다.
나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많은 소리를 듣고 평을 쓰기도 했지만 그가 어떤 발성 공부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소리가 낼 수 있는 환타지의 확장과 심오성에서, 노래의 탁월한 표현력에서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창도 아니고 벨칸토도 아닌 그만의 독창성은 바로 우리 예술의 한 방향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가 재즈 감각에도 능숙하다는 지인의 말을 들으면서 결국 다양성의 축적에서 매력도 개성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쉽다면 그를 국제 브랜드로 내세우는 일일 것이다.
<사물놀이는 실내공연장에서 연주 자제를

이 기회를 빌어 하나 당부한다면 국악 보급의 한 장을 펼친 사물놀이는 음향이 정교하게 설계된 외국의 실내 공연장에서 연주를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청중들 가운데는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나도 그런 이야기를 직접 현지의 한국대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사물놀이는 야외에서 하든가 아니면 익숙한 우리들 청중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처음 듣는 외국인들은 문제가 다른 것 같다.
젓갈 김치가 맛있다고 냄새가 진한 원형 그대로를 아무런 준비 없이 외국인의 식탁에 내 놓는다면 그 반응을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고집이 지나치면 곤란하다. 서양 음악의 백미라고 하는 실내악은 조화의 균형의 극치 예술이다. 그 비밀은 남의 소리를 듣고 균형을 맞추는데 있다. 유럽의 왕후 귀족들이 정치를 하며 리더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소리가 만들어 지는가를 가르친 것이다. 의회민주주의도 이런 뿌리에서 꽃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남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인정할 줄도 모른다. 오로지 자기주장과 독선이 난무한다. 목소리 크면, 뭉쳐서 힘으로 밀면 된다는 억지가 새로운 국회를 만들겠다는 신세대 의원들에게서 그대로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경청하는 법과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훈련이 없어 서로가 잘되는 합리적 방법에 서툰 것이다. 우리가 실내악이 안 되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맥락이다. 이런 미숙함이 부메랑이 되어 오늘의 혼돈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뿌리는 하나인데 편견으로 이것, 저것 너무 가리다보면 길 찾다 해가 기울고 만다. 불필요한 경계심과 벽을 허무는데 예술계가 앞장서서야 한다. 나부터 내 안의 편견이 없는지 반성할 일이다.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닌’ 인류가 한 형제 되어 울리는 화합의 메시지는 어디에 있는가. 베토벤의 합창이 울리는 세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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