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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교수, 강사 경계 없는 풀 교수제는?

탁계석

대학 불신 씻고 거듭 나 경쟁력 확보해야 산다

지금 필자는 음악대학의 교수, 강사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 해방 이후 이렇다할 변화 없이 케케묵은 커리큘럼 문제를 포함해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해묵은 적폐를 털어내지 않고서는 교육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타산지석이 될지 동병상련이 될지 모르지만 미술계에선 이웃 동네에서 일어나는 강 건너 불로 여길지, 바람직한 점이 있다면 마른 잔디에 불똥 튀듯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겉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함께 타오를 것인지 모르겠다.
우선 이번 조사는 강사의 권익 보호에 초점을 두었다. 새로운 능력이 활용되지 않고 기득권 보호에만 골몰할 경우 내리막길이 뻔하기 때문이다. 강사는 ‘파리 목숨’이라던가 ‘보따리 장사’란 옛 상표를 떼어 버려야 한다.
우선의 문제는 불신이었다. 교사, 강사 스스로도 대학에 불안감이 깊었고 학부형이나 학생은 교육의 질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차라리 그 돈이면 유학 보낸다며 될성부른 떡잎들은 조기 유학으로 빠져 나가고 남는 학생들로 교육 하려니 힘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사가 낙타 바늘구멍인 입장에서 개선을 위한 자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예술가의 기질적 특성도 있지만 강사 명함이라도 있어야 레슨도 하고 실업자 소리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강사 자리는 돈’ 이란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 대학 강사자리 하나에 한, 장 두장 했다는 것이다. 그래 필자가 1천이냐, 2천이냐 물었더니 ‘0’ 하나를 더 붙이라고 했다. 일종의 재개발 딱지 사듯 권리증이 되어 나중에 교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란다.
그랬구나. 그래서 서류만 내는 사람은 ‘맹물조합 회원들’이라고 불렀구나. 성상가상, 자기 제자 심기에 혈안이다. 파워를 키워야 밥그릇 싸움 할 때도 높은 고지 점령한 것처럼 의기양양 할 수 있기 때문일까. 대학본부 측이 예술의 전문성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또 챙길 겨를도 없으니 상대적으로 약한 놈, 영양가 있는 놈 골라 이 배수 혹은 삼 배수로 올려 전원 합헌(?) 결정을 내리니 대학의 경쟁력이 이래저래 힘들다.
얼마 전 음악가 원로한 분이 필자에게 자기 딸이 줄리아드 대학원 까지 나왔는데 강사 자리 하나 주지 않고 가는 곳 마다 퇴짜라고 개탄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 지키는 동네’에 모시기엔 대학이 너무 초라해서 일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외국 교수의 경우다. 초청해서 열심히 한 죄 밖에 없는데. 열성파 교수에 학생들이 우르르 몰리자 자위권 발동이 내려진 것이다. 나라가 부끄러운 밥그릇 싸움의 현장이다. 그런데 이번엔 농구 경기처럼 ‘용병’이 들어왔다. 엊그제 일산에서는 제 1회 국제 음악대학 박람회가 열렸다. 학교 당 부스비만 2억원을 들이고 노란 머리 교수들이 실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연을 해보였다.





교수와 강사는 계급의식 버리고 프로는 사각무대 평가 받아야

음악의 경우 지금이 최고 절정 수준이요 양적으로 넘치도록 풍부하다. 실제 능력 있는 이들이 연주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인데 꼭 학교로 가려는 현상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생기고 있다. 화가들처럼 태생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자립심을 길러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한국음악계의 장래가 밝지 만은 않다.
교수와 학생 관계도 학생의 선택권이 강화되어야 한다. 교수나 강사의 시간 수가 학생에 의해 선택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론과 교수라면 모르지만 1 대 1, 개인 레슨만 하는데 교수, 강사 구분이 필요한가라고 반문한다. 이번 기회에 ‘풀 교수제’를 도입해 선진국처럼 교수 강사의 신분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 인격적, 신분적 차별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대학의 내용을 실질 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언제가 어느 대학의 총장이 예술대학은 종합대학에 더부살이를 해서는 안 된다. 콘서바토리로 독립해 전문성을 높이고 특성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입학동기가 불순한 학사 자격증 취득 목적의 학생들이 저 출산으로 굳이 예술대학을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대학은 정체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감지되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여성천국이다. 현악에서 남성은 보호종이고 그간 남성 전용 구역이었던 트럼펫, 튜바, 팀파니, 콘트라베이스에서도 여성 파워가 도를 넘었다. 심각함은 합창에 있다. 남성이 모자라 합창을 할 수가 없다. 합격을 위해 예전의 난이도 과목은 면제다.
이제 예술대학의 행정도 예술단체의 경영 CEO 도입과 같이 예술과 행정을 아는 전문가로 격상 시켜 학교의 경쟁력을 현실화해야 한다.
엊그제 지방의 어느 대학에 들렀더니 적지 않은 제자들이 졸업 후 곧 세일즈맨이 되어 담당 교수를 찾아 준조세(?)를 걷어간다며 이래저래 힘들다고 했다.
예술계에도 IMF가 오는 것일까. 그때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가 자리 하나를 놓고 고민했었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세대교체와 제도혁신으로 터널을 지났다. 그런데 또 산 넘어 산인가. 우리 모두 전업 작가들이 사는 치열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수와 강사는 계급이 아니다. 예술가엔 더더욱 어울리지도 않고 필요가 없다.
교육자와 작가를 구분 못하는 것은 사슴과 노루를 구분 못하는 것 보다 더 어리석다. 교수, 강사의 벽을 허물고 현장과 대학도 각자 자기 위치에서 충실해야 한다. 신동일 이란 젊은 작곡가는 ‘사각무대’를 만들어 창작 발표 후 그대로 객석에서 채점표를 걷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정당하게 싸울 수 있는 사각의 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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