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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홍난파 선생의 옛집 작은 음악회

탁계석

받들어야 할 여명기의 개척자

종로구 홍파동 언덕배기를 가파르게 올라가면 아담한 서양식 2층 붉은 벽돌집이 나온다. 벽면에 잎 떨어진 담장이 넝쿨이 가득 뻗어 있어 세월의 무게가 절로 느껴진다. 아! 이곳이 난파 선생이 미국에서 건너온 1935년부터 41년, 돌아가실 때까지 작품을 쓰며 마지막 사셨던 집이구나. 우리가곡의 날 제정추진위원회가 첫 기념행사로 난파 선생의 집에서 옛집 작은 음악회가 열린 것은 11월 11일 오후 4시.
50여명의 음악가, 작곡가, 시인들이 들어서자 집 안은 잔치 집처럼 북적거렸다. 음악회는 작고하신 선배 예술가를 위한 묵념으로 시작해 우리가곡의 날 선언문 낭독 그리고 바리톤 임성규의 ‘옛 동산에 올라’, ‘장안사’. 어린이 중창단의 ‘퐁당퐁당’, ‘옥수수 하모니카’, ‘고향의 봄’을 불렀고 소프라노 김인혜 교수가 ‘봉선화’와 ‘사랑’을 열창했다. 그 옛날 김천애 여사가 봉선화를 부르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슬픔을 통해 한을 풀고 다시 환생키를 바라는 노랫말처럼 자신의 처지로 그렸던 것이다. 난파의 옛집에서 난파 선생의 노래를 듣는 감회는 남달랐다. 상상해 보시라. 이를테면 슈베르트나 드보르작의 생가에서 그의 음악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기된 최영섭 선생은 비록 오늘 음악회가 자리가 좁아 50여분 밖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영원히 음악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종로구청과 협조가 잘 이루어져 약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내년부터 이곳에서 작은 음악회를 매달 개최할 것이라 했다. 이어 난파의 기념 영상을 보면서 이은상 선생은 난파 선생의 완벽한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과 조국을 사랑한 절절한 마음이 가곡에 담겨있다고 술회했다. 그는 재주가 많아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고 평론, 지휘, 작곡, 바이올린 연주 등 참으로 개척기를 연 위대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90세가 넘으신 원로 작곡가 김동진 선생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얼마 전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고 주변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김동진 선생님의 누상동 집은 지금 어찌되었을까. 몇 해 전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이런 집들을 미리 매입해 기념관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손이 잘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근의 한 피아니스트가 들려준 이야기. 얼마 전 독일에서 개최되는 콩쿠르에 참가하고 돌아와 독일의 예술 관광자원화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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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존중의 정신이 문화국가 만들어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기도 했던 러시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지휘자였던 안톤 루빈시타인 콩쿠르가 독일에서 열린 것이다. 알고 보니 루빈시타인이 드레스덴에서 한 3년간 머문 것을 기화로 콩쿠르를 자기네 것으로 만든 것이다. 올해가 2회째.
이런 예술가 존중의 정신은 그들의 뿌리 깊은 전통이어서 부러움을 사게 한다. 학교를 만든 혹은 출신의 작곡가 이름을 붙여 학교 이름을 세계에 자랑하는 것은 이미 관행화 된지 오래다. 멘델스존 라이프찌히 음악대학, 프란츠 리스트 바이마르 음악대학, 칼 마리아 폰 베버 드레스덴 음악대학, 쇼팽 음악원, 림스키- 코르사코프 콘서바토리 등 이를 보면 예술가야 말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후손들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존중의 정신이 없이 예술가의 티끌만한 약점을 부풀려 부정해 버리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바그너나 R. 시트라우, 카라얀이 나치에 협력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예술이 이념의 희생물이 되진 않았다. 현명한 국민들이 그 아픔을 극복하고 승화시키는 예술적 저력과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다. 바라 건데 수원은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 문화 유산도시다. 난파 선생의 집을 관광자원화해야 한다. 조두남 기념관도 정상적으로 문을 열어 바다와 연계한 관광 상품으로 도시의 이미지 재고에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늦게나마 경남국제음악콩쿠르가 유족들의 이해로 ‘윤이상 국제콩쿠르’로 명칭이 바뀔 것이라 하니 반가운 소식이다.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면 우리에겐 역사가 하나도 없다. 역사는 다시 만들 수 있는 것도, 청산대상도, 건너 뛸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상처의 아픈 기억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문화선진국에서 보듯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은 설혹 작은 흉이 있을지라도 이는 잊고 그보다 훨씬 큰 공으로 예술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한다. 이런 원숙한 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난파의 옛집을 나서며 사람들은 모처럼 낭만에 취한 듯 했다. 기분이 좋았다. 나의 살던 고향집에 온 듯 예술가의 집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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