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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개발과 소통의 문화 그리고 살롱콘서트

탁계석

우리에게 관객개발 정책이 있는 가
오늘 우리 공연계 상황은 눈으로 보아서도 공급과잉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수요, 공급의 균형을 혼란스러운 시장논리에만 맡길 것인가. 많은 제작비를 들인 공연들이 제대로 관객에게 소화되지 못한다면 그 손실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공연기획사의 채산성 악화가 결국 공연의 질을 무너트릴 것이기 때문.
따라서 공연 양의 조절 못지않게 극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공성과 수익성의 균형점에서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지 않게 하는 조절 역할이다.
우리 문화계는 좋게 말해 자율시장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방임이다. 그렇다고 간섭을 하라는 건 아니지만 실험작과 완성된 상품을 파는 극장이 각자 구분될 수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지역 주민을 위해 만든 구민회관이 뮤지컬을 장기 공연해 돈을 벌려고 한다면 정도가 아니다. 문화 다양성이 위축되고 주민 공동문화라는 방향을 잃게 된다.
우리의 경우 공연 증가 속도에 비해 관객 개발이 너무 늦었다. 물론 90년대 접어들어 클래식 대중화로 확산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찾아가는 문화 활동’, ‘해설이 있는 음악회’, ‘11시 콘서트’ 등 마치 수험생 요점 정리하듯 친절로 청중의 마음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이로써 공연계 전반이 하향평준화란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번 무너진 가치를 다시 세우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를 적절히 조절해주고 지켜줄 것은 지켜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돈 벌기 힘든 장르, 돈 버는 게 이상한 예술까지 똑같이 돈벌이를 강요한다면 이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국립 돈 안되어도 책임지는 예술 만들어 내어야
일전 취임한 국립합창단 나영수 예술감독은 “국립합창단이 돈을 벌기 위해 시류에 영합해 춤을 춰야 한다면 국립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고 했다. 백번 옳은 말이다.
국립의 청체성은 오히려 돈 안되는 것을 골라서 해야 한다. 시립이나 민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때 국립의 위상과 존재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창작의 글로벌화 작업, 신진 지휘자 양성 등 진중한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해 존경과 신뢰로 남아야 한다.
가까운 일본은 관객개발에 성공했다. 가히 유럽수준이다.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이 오페라 ‘천생연분’ (임준희 작곡)을 일본 동경문화회관에서 공연했을 때 전일 좌석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우리 측 관계자가 혹 초대권을 사용해 이렇게 관객이 많은가 하는 의중을 물었을 때 초대권이 무슨 말인가?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내심 부끄러웠다고. 현대음악 까지 티켓을 사서 오는 일본과 초대권 주어도 아래 사람 주고 마는 우리와는 너무 거리감이 있다.
그럼 그간 우리는 무얼했나. 새 정부가 이런 것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이제는 전시행정을 버리고 현장 중심으로 문화 혼돈은 막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주 말 야외 나들이 길에 언제나 똑같은 시간대에 길이 막힌다. 한쪽 차선은 휑하게 비워 있지만 동일하게 주어지는 신호 시간 때문에 정체가 가중된다. 이 때 만약 경찰관이 수신호로 흐름을 유도한다면 정체는 훨씬 풀리고 이로써 엄청난 기름 낭비도 막을 수 있다.
현장에선 이런 문제들을 풀 수 있지만 탁상행정은 이를 알지 못한다. 인수위 때 화제가 되었던 전봇대 사건과 동일한 현상이 문화계에 구석구석에 잔존하고 있다. 맥을 짚어야 풀리는데 그걸 모르니 답답하기만 하다.

음악 사회화를 위한 새로운 접근 필요
90년대 까지만 해도 공연장에 클래식 팬들이 서로 눈인사 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어 얹은 것이 ‘열린 음악회’다. 근년에 와서 이런 분위기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열린 음악회가 대중 확산의 공도 있지만 오늘의 열린 음악회는 창의성이 고갈되어 식상감이 든다. 이제는 사회와 예술의 소통 같은 새로운 시각에 접근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베네즈웰라에 불우 아동과 청소년이 중심이 된 오케스트라 인원이 2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처럼 자기 목표를 가진 예술이 아니라 이들 청소년들이 음악을 통해 치유 받고 사회와의 원만한 관계를 가꾸어나가는데 오케스트라가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처럼 초대권 관객과 티켓 구매 청중이 혼재된 극장 문화로는 선진화가 될 수 없다.
지난달 예술의 전당에 모 은행 직원들이 극장입구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절하는 것을 보았다. 스폰서로 이 날 음악회를 통째로 사버렸기에 이 기회를 자사 홍보를 하는 풍경이다. 아직 우리 기업문화가 이런 수준이구나! 하며 안타까웠다. 결국 이날 콘서트는 초대 관객들의 무질서로 연주자가 입에다 손을 대며 주의를 주는 진풍경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사실 기업이 전석 티켓을 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티켓 사서 극장에 오는 설레임과 기대감을 잃어버리게 한다. 공짜로 얻은 만큼 휴식 시간에 극장 문을 나서는 무례도 서슴치 않는다. 이제 우리 극장이 품위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지역 문화 공간들도 상당수가 아직도 초대권을 살포한다. 초대권 나눠 주는 것을 문화시혜로 보는 일부 공무원들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 전문성없는 행정편의주의는 결국 그 도시의 경쟁력을 상실케 한다. 티켓 구매력이 없는 도시에 좋은 공연이 갈 수 없을 것이고 이런 문화 격차가 벌어지면 주민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거리 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살롱 문화로 소통의 문화 만들어 가야
근자에 갤러리 및 소공간에서 살롱콘서트가 활성화 되고 있다. 주류 접대 문화도 크게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만큼 틈새시장을 통해서라도 관객 확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데 문화가 역할을 하면서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대극장 문화만 중요한 게 아니라 작은 생활공간에서 펼쳐지는 살롱 문화가 성숙에 더 큰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공연계를 약육강식의 시장논리에만 맡기지 말고 예술을 보호 육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난 정권 때 ‘순수예술’이 ‘기초예술’로 명칭 변경을 했지만 기초 예술이 튼튼해졌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문화에 불어온 닥친 경영논리가 개인의 의욕을 꺾어서는 안될 것이다. 작은 소 공간 문화를 통해 생활 속에 문화가 베어들게 하려면 새로운 소프트웨어 개발로 더 이상 설명 없이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우리 창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 이번에 중견 작곡가 정덕기가 발표한 코믹 가곡 ‘와인과 매너’가 장안의 살롱콘서트에서 화제다. 이처럼 창작과 사회, 살롱문화와 관객개발의 함수관계를 적극 개발해 나간다면 언제가 우리도 선진국처럼 자연스러운 극장 문화가 정착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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