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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 정의 ‘정선 아라리’ (1992)

이석우

김 정의 ‘정선 아라리’ (1992)
민중의 한과 카타르시스 - 아리랑


아리랑과 관련된 슬픈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아리랑 위령비’ 얘기는 피맺힌 애절 함이다. <삶과 꿈>(2007.11)의 ‘포토기행’이 들려준 사연은 이렇다. 일본 열도 최남단 가고시마의 ‘지바’란 마을은 2차대전 말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의 비행기 발진 기지였다. 오끼나와 쪽에서 일본 본토를 압박해 오는 미군함대를 제재하기 위해 폭탄을 실은 비행기채 함대에 떨어져 함께 폭사하는 자살특공전이다. 그렇게 죽은 이가 1036명, 그 중에 조선인은 16명. 출격 전날 한 조선인 대원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달라고 했더니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 자리엔 평화회관이 세워졌는데 그 모퉁이에 특공대를 추모하는 ‘아리랑 위령비’가 세워진 것이다.

고종황제와 민비가 아리랑 애호자였다든지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 대박을 터뜨려 2년 6개월이나 장기 상영했고, 극장은 울음바다였다는 얘기도 듣고 있다. 그 때문인지 ‘아리랑’은 ‘민요 이전에 핏줄이요 정신이며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그 시작 연대를 려말선초(1391, 공양왕 4년 전후)로 잡는다면 아리랑의 역사는 600여년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 부침이 있어 성창했던 기간은 100여년을 헤아린다. 아리랑 연구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는 박민일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아리랑은 186종이 2,277연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 거의 반에 달하는 1,074연이 강원도에서 불려졌고, 그 중 600여수가 정선 아라리로 파악된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해명이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기원설 또한 다양하다. 멀리는 낙랑시대, 신라초기 알영, 고려중기 아리수 음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의 전오륜(全五倫)의 아라리설이 가장 유력시되지만 조선 후기 대원군 시대의 경복궁 중건에 얽힌 고통을 노래했다는 근대까지 늦춰잡기도 했다. 정선을 아리랑의 진원지로 보는 데는 고려말 충신 전오륜 등의 정선칠현이 그곳에 은거하여 망국의 한을 다스린 데서부터였다는 문헌적 근거에 따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리랑이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점이요, 그 때문인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들고 있음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이 사는 곳은 어디나 세계 어느곳에 이르기까지 가장 친숙한 민족과 고향의 노래가 되고 있는 터이다.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 님 웨일즈(Nym Wales)가 독립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아리랑으로 기록한 것도 6.25 때 참전한 16개국 군인들이 아리랑만은 곧잘 부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작가 김 정이 강원도 정선땅에 처음 간 해는 1967년, 스켓치와 답사 여행을 떠난 것은 1974년이란다. 그는 그의 자전 에세이 <김 정 아리랑>(선우 미디어, 2003)에서 정선 아라리와의 만남을 이렇게 썼다.

정선 아라리는 어떤 철학적 감흥이 가슴 속에서부터 나오는 듯하다. 노래가 요란하거나 흥겹지는 않지만 깊은 맛이 있다. 아마도 깊은 산속의 적막과 그 속의 진저리나는 고독이 노래로 표현되어 그 노래가 다시 삶의 힘으로 재생되는 청량제가 되어 그렇게 느꼈나보다. 정선에 정선 아라리가 없었다면 그 옛날 어떻게 살았겠는가 반문하게 된다.

이후 그는 정선 아리랑에 빠져서 정선, 평창, 영월에 살다시피하고 아리랑에 매료되어 다른 분야의 국악도 좋아하게 됐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오


딸이 가야금을 전공하고 아내인 아동문학가 최자영은 여창가곡으로 김월 하선생의 문하의 이수자로 있으니 가정 분위기는 소리와 그림이 만나 훨훨 타오르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인의 가슴속에 깊이 묻혀 발산해온 아리랑의 심성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며 캠퍼스 앞에서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현재까지의 회화 700여점, 드로잉 및 스케치 2,000, 조각 등 입체 작업 150여점 중 회화 400여점이 아리랑 연작에 해당된다. 40여년의 화가 작업 세월 중 26년이 아리랑 작품제작에 쏟은 시간들이었다. 그가 ‘아리랑 화가’로 불려지게 되고, 사는 집도 아리랑 하우스, 자신이 아리랑 노래를 직접 부르며, 그의 자전 에세이 책 이름도 ‘김 정 아리랑’이라고까지 하는 데는 그간의 내공이 쌓인 자연스러움이다.

아리랑의 노래말 속에는 어떤 민중정서가 깔려 있을까. 우리 정신사를 주도해온 유교, 불교, 도교, 무속의 성격에 따라 분류하면 도교적 무위자연, 즐기기, 허무 자연애의 성격이 그 반을 차지한다. 이어 불교의 인연과 제행무상이 뒤를 잇고 충효와 근노를 부른 유교, 무속의 순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기층민의 한과 해후와 바램을 노래한 것이기에 그 심성별로 보면 애정과 놀이, 헤어짐의 아픔과 그리움, 성적 은유 등이 솔직히 드러나있고 노래를 통한 카타르시스적 자기 해소의 내용이 두드러진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저항과 개혁에의 갈망, 체념과 좌절, 원통함이 변주하듯 다르게 반응하고 형성되어 왔다.

우리 부모 날 차즈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 (다산 광복군)

생활에 쪼들려 넘는 고개
북간도 가는 손들 눈물의 고개(북간도 아리랑)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힘께나 쓰는 놈 대판가고
아깨나 낳은년 갈보질가네(본조 아리랑)


아리랑은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도 아리랑의 후렴에 기대어 털어놓듯 직접적으로 숨김없이 토설한다. 그래서 슬픔과 비애를 말하는 듯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소망이 밑바닥에 맥맥히 흐르고 있음이다. 이는 바로 한민족 심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고통 속에서도 환희를 가난속에서도 해학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회복의 끈질긴 생명성을 말한다. 이것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역사 속에 살아남았고 그들과 다른 특유의 독자적 문화를 이루며 오늘도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는 정신의 원천이다.
김 정의 아리랑 연작을 보면 평창, 강릉, 삼척, 서산, 서울, 밀양 등 지역별 작품도 등장하지만 역시 정선과 진도 아리랑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도 두 아리랑의 차이를 꿰뚫어보고 자신의 화폭에 자연스럽게 노출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 두 곳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정선 땅이 사방으로 막힌 산이라면 진도는 사방이 뚫린 바다로 대조적이다. 진도는 바다 풍랑 때문에 정선은 소금 구하러 준령 넘는 사고 때문에 근심과 비극을 안고 산다. 그래서 두 곳 다같이 굿과 춤이 있고 굿춤은 많다. 진도는 정선에 비해 삶의 방식이 다양하다. 육지 해상을 겸해서 생기가 있다. 탁 트인 앞바다는 율동이 있다. 그러나 정선은 막힌 산 속으로 고요가 흐른다. 그래서 진도와 정선은 산과 바다의 관계처럼 대오적이면서도 동질의 맛을 준다(같은책, 54쪽).




필자도 진도 아리랑을 가끔 들은 기억이 새롭다. 아직도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요내 가슴 속에 수심도 많다/ 아리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라는 노랫말이 귀에 익는다.
김 정 교수 자신이 이 두 지역의 특성에 따른 작품 내용 변천을 시기별로 정리해주고 있다. 정선의 경우

1. 1970년대: 산세의 험준한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2. 1980년대: 산보다는 계곡의 안개와 소나무의 상징성 표현
3. 1990년대 소나무, 도라지, 옥수수, 하늘, 계절 변화
4. 2000년대: 산 하늘, 율려, 계절
5. 최근: 달, 세월, 인생, 단순성

진도 아리랑 연작들에서는 바다, 섬, 유채꽃, 파밭, 파도 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1. 1970년대: 바다의 상징성
2. 1980년대: 섬과 마을 바다를 직접 묘사 표현하고픈 내용이 강하다.
3, 1990년대: 섬, 파밭, 유채꽃, 바다, 파도 등의 상징
4. 2000년대 이후: 섬, 바다, 달, 세월

김 정은 오방색을 쓰고 화면에 넓은 색면을 도입하며 독수리가 치솟 듯한 붓질을 통하여 소리의 속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동시에 깊은 정신성과 투명함, 우주적 공간 속의 시간, 세월을 내포시킨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주는 분위기는 밝고 율동이 있으며, 신나고 역동적이라는 데 주목할 일이다. 그것은 시름과 아픔 속에서도 소망과 꿈을 잃지 않는 민족의 심성을 바르게 포착한 그의 통찰력에서 온다고 본다.

미술자료를 보존하려는 집념(?)과 미술 교육을 위한 저술과 논문은 앙가쥬망과 조형 미술 학회 활동, 넉넉하고 구수한 인간적인 풍모를 여기 다 기술할 수 없어 안타깝다.

직감과 사색의 작가 김 정은 소리에서 색과 형태를 이끌어낸 높은 안목의 창조성을 이루고 있다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박민일, 한국 아리랑 문학 연구, 강원대 출판부, 1994
______, 아리랑 정신사, 강원대 출판부, 2002.
신갑순, 삶과 꿈, 삶과 꿈 (2007, 11)
김 정, 자전적 에세이, 김 정 아리랑, 선우미디어, 2003
______, 김 정 화집, 예경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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