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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에버레트 G. 잭슨의 ‘전함에 타다’ (Embarkation)

이석우

에버레트 G. 잭슨의 ‘전함에 타다’(Embarkation)

전쟁, 진정 피할 수 없는 비극인가




낯선 나라에서 색다른 사물,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은 흥분스러울 정도로 즐겁다. 미국의 곳곳을 가보았지만 캘리포니아의 햇빛 밝은 기후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더구나 이 지역은 가는 곳마다 풍광의 명소와 유서깊은 미술관들이 우리를 기다리듯 위치해 있다. 기실 미술 하면 유럽 미술관들을 생각하지만, 미국 자본의 힘은 그곳의 명품들을 미국에 옮겨놓은 것이 상상 외로 많다. 나는 감히 세계의 미술이 미국의 박물관, 미술관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번 남가주 샌디에고(San Diego) 미술관에서의 잭슨(Everett Gee Jackson)과 그의 직품과의 만남 또한 이런 문화적 분위기의 산물이리라.

샌디에고는 미국 서부 최남단의 항구 도시로 멕시코와 국경 도시이다. 샌디에고 시의 역사 또한 200여년전 스페인과 관계 지으며 발전했다. 그래서인지 그곳의 다혈질이자 뜨겁게 달궈진 남국풍의 문화는 이국적이며 전설의 느낌마저 갖게 한다. 샌디에고 미술관의 시작도 파나마 운하 개통(1915)을 기념해 같은 해 열린 파나마-캘리포니아 박람회와 인연을 맺고 있다. 지금 미술관이 위치한 명소 발보아 파크(Balboa Park)에서 행사가 있었고, 그 중심부에 미술관이 준공된 것이 1926년이다. 미술관 외에도 그 옆에 팀켄 미술관(Timken Museum of Art), 그곳에서 8분 거리에 위치한 세계적 수준의 사진 박물관(Museum of Photographic Art)이 함께 위치하게 된 것도 이런 문화적 사연과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 샌디에고는 한마디로 바다, 꽃과 종려나무, 투명한 햇빛, 문화 즐기기라고 요약하고 싶다. 우리가 보는 파초의 크기가 우리 키의 2-3배라고 생각하면 그곳의 이국성이 무엇인지 쉽게 감지되라라.

내가 방문한 샌디에고 미술관에서는 ‘에버레트 잭슨, San Diego Modern, 1920-1955’ 제하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의 전반기 작품 52점이 걸린 작지 않은 전시회였고, 같은 주제의 도록도 발간되었다. 강한 색감과 볼륨, 기하학적 도상의 작품들에 나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나를 전율시킨 그림 하나, 그것이 ‘전함에 타다(Embarkation, 1938)였다. 찌르듯이 다가오는 느낌은 전쟁에 대한 거부감, 반전사상이었다. 거대한 함포 앞에 던져지듯 기죽은 해군들의 무력함은 처절한 절망 그것이었다. 나는 한나절을 그 특별전 방에서 보냈고 이 작품을 몇 번이고 돌아와 보고 또 보았다. 다른 일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샌디에고 미술관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야 했다. 그리고 잭슨이 누구인가를 잔걸음으로 찾아나서고 있었다.

잭슨은 1900년 텍사스의 멕시아(Mexia)에서 태어나 199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20세기를 모두 산 셈이다. 21세의 나이에 멕시아를 떠나 시카고 미술학교(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14개월여 머무르며(1921-22) 미술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인상주의풍의 그림이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마을은 크게 바뀌어 3500여명 주민의 조용한 타운은 석유 유전 발굴로 크게 들떠 있었고, 인구는 10배 이상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가 한 친구와 함께 멕시코로 미술 여행을 떠난 것은 1923년 가을, 돌아온 해는 1927년 봄이니 거의 4년여의 세월이었다. 그 시기는 멕시코 혁명(1910-1920) 뒤의 정치 사회적 변화의 격동기였지만 미술 문화 또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기였다. 그는 이 소용돌이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인상주의풍의 전래적 그림을 떨쳐버리고 멕시코 모더니즘에 확고히 경사하는 뚜렷한 변신의 시기였다.




멕시코 혁명은 거칠고 요동치는 변주였다. 그것은 농지 불평등 소유와 사회적 억압, 외세의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것으로 민족 해방과 사회 개혁의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일례를 들면 1900년까지 외국인 투자가가 모든 투자의 90%를 차지했고, 그 가치의 70%가 멕시코 아메리칸이 소유하고 있었다. 멕시코 농지 역시 4억 8천 5백만 에이커 중 그 3분의 1 이상이 외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다. 이런 현상이 자기 정부에 대한 불안을 가증시키고 이를 제거하려는 변혁가들이 자파타(Zapata)와 같은 전투적 혁명가의 뒤를 따르게 했다. 이 때 출현한 미술은 이런 민중 혁명의 의지를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 미학적 영감의 뿌리를 그들의 마야 전통 문화 정신에서 구하고 이를 현대 미술과 만나게 하며 일으킨 변화였다. 이를 대표적으로 주도한 인물이 교육부 장관 호세 바르콘첼로스(Jose Vasconcelo)였다. 비록 정치적으로 우파의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재임중(1921-1924)에 멕시코 국민들에게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를 갖고 있었다. 이를 지속시키는 방법으로 리베가(Rivera), 오로즈코(Orozco), 시케이로스(Siqueiros) 등에게 학교나 공공 건물의 벽화 작업에 참여토록 했다.

잭슨에게 이러한 벽화 그림들에 접할 수 있게 하고 작가들과 만나게 하며, 산토 도밍고에서 고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인물이 있다. 인류학자이자 그의 친구인 브레너(Anita Brenner)로 그는 진정한 멕시코 미술의 현대적 정체성은 고대와 전통, 현대가 함께 모여 시너지 효과를 낼 때에야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와 깊이 사귀고 있던 잭슨은 이에 크게 공감했고, 이런 벽화들을 미국인 화가로서 맨 먼저 접한 것도 잭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한 오윤 등이 리베라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도 이러한 민중문화와 전통 문화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함께 공유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가 멕시코에서 돌아와 샌디에고에 정착한 1926년을 기점으로 작품세계는 그 이전의 것과 뚜렷이 대조를 이루며 변했다. 빛의 변화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어있거나 색들의 경계없는 혼합과 같은 수동적인 그림에서 탈피하고 있었다. 강한 대비의 선과 면, 기하학적 대상들의 확고한 독립성에 따른 배치, 사물의 볼륨과 살아있는 혼이 내재한 듯한 생기 띤 형태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30년대는 미국이 대공황(1929)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자리 부여 행정 정책’(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을 실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샌디에고를 중심으로 이 일에 적극 참여했다.

유럽에 머물며 미술 수업을 하지 않았던 그는 멕시코 미술, 그 아방가르드에 접하면서 자기식의 모더니즘 미술을 창출해낸 셈이다. 그에게 모더니즘이란 무엇이었던가. 잭슨은 완전한 작업은 완전한 조직성을 담고 있어야 하고 우연이라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형태나 색, 선들을 추상적으로 고려하되 정서가 경험에 객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각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순히 재생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앳킨슨(Atkinson)은 잭슨이 사물의 표면을 보지 않고 진실을 보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미국 모더니즘에 공헌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 같다.

잭슨은 모더니스트로서 각 개인 정서를 중시하는 입장과 동일 선상에서, 빛에 따라 변하는 외양적 요인에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나라와 국민들, 그리고 각 개인마다 스스로의 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 자체의 리얼리티와 독립성을 중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들 중에는 사회 개혁과 소외 계층, 역사 현실의 주제가 등장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때 우리 미술계는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적 요인이 배제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이란 현실이나 역사와 분리되어 자기 관념에의 자족이나 미를 위한 미의 포착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개념의 오해(?) 말이다. 물론 남북 분단이라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결 아래 작가가 사회 비판과 역사 현실을 치열하게 다루는 데 제한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함에 타다’(1938) 작품으로 돌아가자. 193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 전역에 군인들이 훨씬 불어났다. 해군 기지가 있는 샌디에고에서 제복의 해군들이 눈에 띠게 많아졌을 터이다. 그의 그림에는 1934년부터 해군이 등장한다. 이 무렵 유럽에는 전운의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1차 대전(1914-1918)이 끝난 지 20여 년 동안 유럽 나라들은 제각기 불만이 가득해 있었다. 특히 독일은 그 배상금 때문에 인플레와 실업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1936년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공격하고 히틀러가 1939년 폴란드를 침입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3일 만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암울한 분위기에서 이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냉엄한 강철의 함포구 앞에 벽돌 같은 4각의 제모를 쓰고 유령처럼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그들은 마치 죽음의 대열에 서 있는 듯하다. 기계 앞에 무력한 인간, 전쟁과 증오 앞에 왜소한 인간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들이 등에 무겁게 짊어지고 가는 배낭은 누군가 뒤에서 당기듯 무거워 보인다. 잭슨은 색을 아껴 갈색과 회색을 번갈아 견제시켜 나가더니 대포와 해병, 그리고 제복과 제복 사이 밑바닥에 붉은 오렌지를 써서 긴장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거칠은 붓질은 이 절망 같은 군상들의 아픔을 더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도 계속되어야 하는가. 2차 대전 종결 후 5년만에 한국 전쟁이, 최근에는 9.11테러가 일어났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잭슨의 슬픔은 바로 우리의 슬픔이다. 앞으로도 갈등이 줄어들지 않고 더욱 확대 확산되리라는 데 우리의 불안한 좌절이 있다.




참고문헌

1. D. Scott Atkinson, Everett Gee Jackson, San Diego Modern, 1920-1955, San Diego Museum of Art, 2007.
2. San Diego Museum of Art, Selected Works, SDMA, 2003.
3, Michael C. Meyer(ed.), Oxford History of Mexico, Oxford,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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