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0)김차섭의 ‘결단의 순간’

이석우

정동(貞洞)은역사로말을건다


서울의 정동(貞洞) 은 특별한 느낌이다.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외딴섬의 한적함.그래도 그곳을 걷노라면 역사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올 때가 있다. 정동이 형성된 사연 또한 애틋하다.

태조 이성계는 사랑하는 신현황후의 능을 그곳에 쓰고 정릉이라 했다(1338). 도성안에 무덤을 두지 않는다는 전례에도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 일이다. 왕비 능이 경복궁루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있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 묘역을 위해 흥천사를 두었다. 아침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태조는 아침 수라를 들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했다.

그러나 세월이 무심 한가 권력이 야박 했던가.왕자의 난을 겪으며 끝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위를 계승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1409) 능은 지금의 정능(서을 성북구 정능동 산 87-16)으로 옮겨지고 흥천사마저 자리를 떠나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돈암동 일우를 지켰다. 정릉지역은 그렇게 잊어져 가는 듯 했다.

정릉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개항과 더불어 이다. 정동에 외국인이 거주하기 시작 한 것은 그들의 거주가 허용된 1883년부터. 외국공관 으로는 제일 먼저 미국(1883),이어 영국(1890), 독일(1889), 프랑스(1896), 러시아공사관의 순서로 들어섰다. 당시 수교한8개국중 이태리, 중국, 일본을 빼고 모두 모인 셈이다. 지금은 독일 대사관이 한남동에 있지만 캐나다대사관을 정동에서 볼 수 있다.

역사의 스폿트라이트를 더욱 받게된겄은 고종이 덕수궁으로 옮긴 후부터 이다. 민비시해 사건(1895)이후 경복궁에 감금상태에 있던 고종이 몸을 피한 곳은 러시아 공사관(1896년 12월 11일-1897년 2월20). 사실 그가 덕수궁을 택한 것도 외국 공관이 그곳에 집중되어 허허한 경복궁보다 신변의 안전을 상대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고종이 ‘아관 파천’뒤 덕수궁으로 돌아온 그해 가을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 마당사이에 담장이 쳐 졌다. 그 사이 작은 통로가 나있는데 이는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에 연결된 비밀통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수궁이 헐려나가는 훼철과정은 근대사수난의 통증 이다. 김정동 교수에 따르면 덕수궁은 원래의 크기에서 3분의1정도 축소 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구 경기여자고등학교, 덕수초등학교 터가 북문인 영성문 궁궐지역이다. 수옥헌 영역은 정동극장 일대, 미대사관저도 덕수궁 궁궐역에 해당된다. 그 자리가 신현황후의 능터였다는 그의 답사는 왠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지금 정동 극장(구 알렌 저택) 자리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역사의 무개로 짓눌려 있는 증명전(重明전)과 만난다.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이 설계하여 ‘궁궐 도서관’으로 고종이 세운(1896) 지상 2층 지하 1층의 벽돌조의 서양식 이양관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등박문의 강요로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이다. 몇년전 이미 고인이 된 김영상 서울 문화 사학회장님과 회원들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의 초라한 충격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1905년 11월 9일 경성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손탁호텔에 머물면서 대신들을 갖은 방법으로 회유했다. 11월 17일 새벽 일본군이 덕수궁 대문안을 지키고 담장 주변을 둘러쌌다. 8명의 대신들이 수옥헌(중명전)에 모이고 이토가 들이닥쳤다. 오후 3시 고종이 참석한 회의, 고종은 중간에 함녕전으로 돌아갔다. 오후 8시 협약은 중명전 2층에서 5적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토 히루부미는 같은 해 12월 21일 초대통감 고종은 1907년 7월 19일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퇴위당하여 중명전에 유폐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것은 1919년(1.22) 그 비운의 죽음 파란의 인생은 3.1운동의 폭발을 예감케 했던가?

정동길에서 경향 신문 건물 쪽으로 가다보면 이화학당, 지금의 이화 고등학교가 있다. 그 옆에 서울 지방 국토 관리청(관립법어학교자리), 길 건너 전 언더우드의 집 자리에 예원학교,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옛 러시아 공사관의 탑이 여전히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예원의 벽에는 박태원의 돌담길 얘기를 전광판에 실어내고 있다. 하지만 내겐 어쩐지 그 의도와는 달리 정동의 그윽한 분위기를 깨고 있는 듯한 생경함이 느껴지는데 이것이 나만의 과민이기를 바란다.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이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여사에 의해 세워졌다. 시작은 한옥에서였다. 이화라는 이름은 명성황후가 명명해주었는데 조선왕조의 상징 꽃인 ‘이화’와 관련 있음직도 하다. 손탁 호텔(1923년 프라이홀)이 있던 자리에는 이화 100주년 기념 이화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본인이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는 창립 120주년에 개관한 이화 박물관이 1주년을 맞이하여 ‘사진으로 보는 이화의 옛 모습전’(2007.5.30-6.30)을 열고 있었다. 자원 봉사 학생들이 친절히 안내해 주었고 유관순(1902-1920.10.12) 열사의 교실은 엄숙히 잘 재현되어 있었다.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한 그녀의 수인복 입은 결의찬 사진이 교실을 숙연케 했다. 한복 입고 이화 뱃지를 저고리에 단, 태극기를 손에 쥔, 다부진 그녀의 초상은 모든 이화 학교 교실에 걸려있다.

김차섭의 ‘결단의 순간’(1973)이 제작된 것은 유관순 기념관을 위한 것이었다. 수년전 본인은 그 작품을 보러갔을 때는 고색 창연한 벽화처럼 2층의 큰 벽을 차지(그림 크기 380x446cm)하고 있었다. 근래 다시 보고자 했으나 건물을 재건축 중이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의 그림은 우선 여타의 대부분 작품이 조각을 포함해서 시위와 만세 부분을 그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어떤 결단의 순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것은 적어도 그가 3.1 운동의 주체, 의미, 그 성과에 대해서 어떤 내적 고민을 하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김차섭은 그 작가적 고집, 존재 생성의 힘, 문화의 원류와 자기 정체성 찾기에 깊은 갈증을 느끼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역사의 고장 경주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 6.25 전쟁과 좌와 우의 대립, 죽음들을 목격했다. 대학 시절은 배고픔과 이데올로기의 광기, 군사 문화를 헤치며 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결단의 순간’ 제작을 한 그해 1973년 그는 록펠러 장학금으로 미국행을 떠났다. 그때까지의 작품들을 보면 팝계통의 ‘자화상’(1968), ‘원근’(1970), ‘상황’(1971), 삼각형과 함께 한 돌무더기 ‘철기시대’와 같은 것들이다. 미의 원형 탐색, 구상과 추상을 병용하는 아방가르드적 화풍의 성격이 짙다. 반면 ‘결단의 순간’은 정통의 아카데믹 작품을 견지한다.

70년대 미국에 간 후 당대 그곳의 키퍼(Kiefer), 로텐버그(Rothenberg) 등이 주도해 가던 신표현주의를 만나지만 어쩌면 이 기록화가 그에게 역사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듯하다. 그는 미국 문화에 부딪히면서 줄곧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고 문화의 원류를 찬고 싶어 했으리라. 그것이 자화상으로 다시 경주의 왕릉의 연상시키는 ‘철기시대’의 제작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스키타이 철기 문화가 경주의 왕릉에서 확인되는 것을 보고 그는 우리 문화의 역사적 우위를 확인한 듯하다. ‘동북 아시아’(1998)에서 지금 통용되고 있는 북남의 지도를 우리 조상이 해온 대로 남북으로 도치하여 그린 것도 그 같은 문화 원류의 우위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김차섭은 3.1운동, 4월의 유관순 시위, 그리고 옥중사한 역사적 선택을 어떻게 그릴까 하고 고민했으리라. 그것은 아마 그만의 것이라기보다 역사를 바르게 알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 과제였을 터이다. 나 자신 한때 일제 식민지배에 항거한 민족적 봉기에 대해 교과서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3.1운동에 대해 어떤 콤플렉스 같은 것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우선 33인의 대표성에 대한 의구심이요, 그들 지도자들이 어떤 패배주의적 처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고다 공원에 가서 선언서를 직접 읽고, 시위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태화관에서 선언하고 스스로 잡혀가는 수동적 자세가 못마땅했다. 부끄럽게도 그들 중의 일부는 변절했다. 그들의 저항 운동은 어떤 무력 항쟁 같은 실력 행사라기보다 비폭력적 무저항주의를 채택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지나치게 기대는 등 외세 의존적이자, 그 자결원칙이 전승국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독립의 근거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일제를 동양의 지지자나 동양 평화의 간성으로 평가하는 등 일본에 대한 인식이 투철하지 못했다. 운동의 주체가 민족 부르주아지인가 아니면 노농공 학생이 모두 일어서는 민중적 봉기였는가에 대한 의구심 등이 깔려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다시 성찰해 보건데 33인의 선언이 점화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전민중, 민족적 봉기로 확산되며 적어도 임시 정부 수립의 전기를 마련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도 전략적 선택일 수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어쩌면 무력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윌슨의 자결주의가 당장의 효과는 없었을지라도 역사가 흘러갈 지향점이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1919년 3월부터 국내외에서 200여 만(당시 인구 2000만 명)이 참가하였으며, 그 구속자의 계층분류로 볼 때 단순히 지식인 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노농상 등 모든 계층이 봉기의 주체가 되었다. 처음 예상했던 것을 훨씬 넘어 전국적인 민중 운동으로 그것도 자발적으로 확산되었던 점에 주목해야겠다. 무엇보다 3.1운동은 그동안의 입헌군주제적 사고에 묶여 있었던 것을 풀어 헤치고 민주 공화정의 수립 목표를 설정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다.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중대한 것일수록 해석은 다양하다.

나는 70년대 이 그림을 그린 김차섭도 여러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 그림을 보다 정신성 깊은 내면적 선택의 결단으로 그린 이유도 거기에서 찾고 싶다. 이 그림은 시위의 현장이 아니라 감옥이다. 유관순 옆의 착고는 우리민족 지난날의 질곳이며 묶음쇠. 그의 말을 빌리면 시위 같은 instant보다 여기 서 있는 9사람 모두의 역사적 역할을 생각했다 한다. 우측의 벼슬아치, 지식인들은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농민과 학생(유관순을 포함), 행동자이며 가슴 풀어헤친 노동자 모두가 주체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위와 좌 햇빛이 밝아 오는 쪽의 청소년은 미래의 희망이며 기대를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본인은 지금 이 글을 미주 여행 중에 쓰고 있다. 정동의 시립 미술관, 덕수궁 돌담, 정동길이 눈에 잡힐 듯이 선하다. 홀로 걷는 그 길은 고독의 길이지만 자유의 길이기도 하다. 가을비 내리는 날, 의자 깊은 작은 커피샵에 앉아 유리문을 통해 바라보는 돌담은 정신의 왕래였다. 맵고 화끈한 콩나물 국밥, 작은 프로방스의 스파게티, 정잿나루의 김치찌개는 주인장처럼 후더분하다. 그 주인이 내게 전해준 신문 한 장 ‘신아일보 사우회보’(발행인 장기효). 신군부 아래서 문이 닫힌 ‘신아일보’의 그때 사우들이 27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유하는 내용을 전하는 회보였다(2007.7.25). 중명전 지역에 붉은 벽돌의 신아일보 별관이 고풍스럽게 서 있는 까닭일 것 같다. 회보에는 30여년 전에 자주 들렸던 단골집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용화점을 경영하던 왕서방, 한국 부인 전재산 홀홀단신 고국으로, 지금은 ‘정잿나루’로 바뀜. 학생사➔덕수정으로 상호는 바뀌었지만 신아인 알아보는, 그 주인 그대로. 문화 다방➔엘림 커피, 달걀 노른자 띄운 모닝커피의 추억, 길 건너 새 이름 새 둥지, 하남호텔➔캐나다 대사관, 밤 세워 ‘서양화 공부하던 곳’ 이젠 역사 속으로.”

여기 이 기록을 남긴 것은 어떤 개인적 호오 때문이 아니다. 정동길 변화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들이 잊혀지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된다. 그것들은 일어난 역사일뿐 아니라 기록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정동, 고종 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동아일보사,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 3.1 운동과 민족 통일, 동아일보사, 1989.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 김차섭의 오디세이, 한국 문화 예술 진흥원, 2002.
이석우,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 소나무, 1997.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