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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채용신의 <항일지사 김영상 투수도>

이석우

행동하는 화가, 미술로 지피려는 국권회복 의식

때로 빗속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심중이 울울할 때이다. 석지 채용신도 한말 일제식민시대를 살면서 그런 심사를 자주 느꼈을 듯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 답답한 가슴이 후련해졌을 터이다. 채용신은 1850년 2월 4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고위 무관직을 지낸 가통의 집으로 수군첨 절제사였던 채권영의 3남 중 장남으로 였다. 1886년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자신의 이름을 용신이라 하였다. 그가 194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2세의 비교적 긴 삶을 이 지상에서 누렸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관료 관직으로서의 삶(1886-1905)이요 후반부는 화가로서의 인생(-1941)이다.

무관 출신이면서도 전문화가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화력이 이채롭다. 그는 한국 미술사상 최초의 전업 작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초상화 공방을 열고 주문 방식을 통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담하게도 드러내 놓고 광고를 내고 해당 제작비까지 명기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한 시대의 거인으로 만든 것은 그의 화가로서의 자세에 있었다. 그는 투철한 위정척사 정신의 소유자로서 민족의 혼을 그림을 통해 되살리려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정범석은 그의 글에서 채용신의 그림 제작 태도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우국지사나 도학자들의 초상을 그릴 때 그 집안이나 사당을 직접 방문하고 대게의 경우 대가 없이 그려 주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합당한 제작비를 받되 그 신분을 구별하여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기량을 다하여 그렸다는 지적이다.

개인의 영달과는 달리 국운은 날로 기울고 있었다. 앞서 말한 을사조약(1905. 11. 17)이 사실상 조선왕조의 맥을 끊자 그는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표표히 향리로 떠났다. 이후 그는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 무렵 그의 인생에 전환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면암 최익현과의 만남이다. 조선미 교수에 따르면(채용신의 생애와 예술-초상화를 중심으로, 석지 채용신, 삶과 꿈, 2001) 그가 관직을 그만 둔 것이 1906년 4월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채용신이 면암을 만난 것이 관직 사임 직전인지 그 후 인지는 좀 더 조사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채용신이 그린 면암의 초상화 모관본의 제작연대는 1905년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국립박물관 소장본의 우측 상단에는“면암 최선생 74세 상”이라 써 놓았다. 면암의 탄생 연대는 1833년이니 74세를 합하면 1907년이 되고 한국식 나이계수라 하여 1년을 뺀다하더라도 1906년에 해당된다. 그래서 본인의 소견으로는 모관본의 제작년대를 다시 검토할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석지의 <항일지사 김영상의 투수도>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영상(1836-1911) 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전북태안군 고현면 원촌,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서 태어났다.

이 <투수도>(세로 73.5cm, 가로 50cm, 필양사) 즉 만경강에 몸을 던져 죽기로 작정한 이 그림내용이 있기까지의 사연은 이렇다. 일제는 그들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줄이고 회유하기 위해 원로 지방유생에게 소위 “노인 은사금”을 보냈다. 김영상이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일본천황 모독 죄에 걸린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태인지서에 끌려가 구타와 위협을 당하였다. 군산형무소로 이송하는 중 김제를 지나 만경강 사창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망사주까지 손자에게 써 주었던 그는 강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 일은 강에서 구출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 다음날 군산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911. 5. 9) 이를 기려 후손과 유생들이 정읍 무성서원 옆에 필양사를 세웠다.(이태호, 이동환의 글 참조)

이를 알고 있는 채용신은 이를 그려 애국심을 고취하고 후손에 전하고자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부감법으로 그린 화면 중앙에는 배가가로 질러 떠있다. 그 옆 좌측에 물에 뛰어들어 죽기를 몸부림치는 김영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를 본 배에 탄 두 명의 순경이 당혹해하며 배를 멈추고 건져 내기를 독려하고 같은 배의 승객과 뱃사공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사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 하고 있다. 재미있는것은 화면 상단 밑에 가로로 연기를 뿜고 지나가는 기차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1914년 호남선 철도 대전 목포간의 철로가 개통 되었으니 이무렵 기차가 운행 되었을 것이다. 평소 모든 그림에는 그 시대와 정신을 담고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또 다른 즐거움을 만나보는 셈이다.

필자는 왜 석지가 김영상이 세상을 떠난지 11년이 지난 1922년에 이 그림을 그렸을까에 대한 의문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면암 최익현의 정장관복본도 면암이 세상을 별 한지 18년 후인 1923년에 그렸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그가 일본을 여행하는 등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초기 항일 열정이 조금은 시들어 질 듯한 무렵인데도 말이다.

나는 그때의 역사적 정황에서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이들 그림을 그린 것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 난지 3, 4년 뒤의 일이다. 강재언이 지적하고 있듯이 민비시해, 을사조약, 한일합방 후를 이어 그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오던 여러 갈래의 조국 회복운동이 합류하여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기이다.

이런 때 누구보다도 뜨거운 독립의 열망을 내연해 오던 채용신이 분연히 붓을 들었다. 면암을 비롯한 김영상과 같은 독립거사들의 초상과 행적을 그려 민초들의 가슴속에 불을 지르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진정 행동하는 미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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