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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신순남의 <애도>(1980)

이석우

피어린 고난의 행진-민족 유민(Diaspora)사의 산 증언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같은 민족끼리 함께 살지 못하고 흩어져야 하는 것은 비극이었다. 우리민족의 역사도 이산의 눈물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연해주로의 이민은 1863년에 시작, 그 해 겨울 13가구의 농민들이 밤을 틈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1870년에는 연해주 한인 수가 8천400명에 이르렀다니 이들은 압정과 수탈, 빈곤과 기근을 피해 국경을 넘어간 것이다. 여기에 일제 침략하의 농민 수탈 정책은 이 흐름에 급류를 더하게 했다. 1918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 농가 호수의 3.3%인 지주가 전 경지면적의 50.4%를 소유하였다.

전 농가 호수의 37.6%가 소작농, 39.9%가 자작 겸 소작농, 자작농은 겨우 19.6%에 불과 했다.전 농가 호수의 76.9%에 해당하는 농가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5-7할에 달하는 소작료를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는 농민들이 빈곤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고 유민을 유발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강재언,『 한국근대사』)1926년에는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한 한인 전체인구는 16만 8천명 그 중에 12만 3천명이 연해주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1934년부터 집단농장이 건설되고 한국계 소련인들의 농촌 집단생활이 시작되어 농업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신연자,『 소련의 고려사람들』). 이러한 경제적 토대를 기저로 하여 민족문화와 교육을 일구고 고국의 독립운동까지 지원할 수 있는 저력을 쌓았다.




그러나 운명의 시련은 이만한 정도의 안정조차 시기했던가. 1937년 가을 20만에 이르는 연해주의 재소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 당해야 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재소 한인들의 자치주 움직임을 미리 막고 앞으로 예상되는 소련과 일본의 전쟁에서 있을지도 모를 조선인 일본 편들기를 예방하고자 했다. 겨우 하루 이틀 전에 통지를 받고, 삶의 터와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눈물의 길을 떠나야 했다. 이동된 한인들은 총18만명. 굶주림과 불어 닥친 추위는 가혹하게 노인들과 어린애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시신은 형편이 되면 철로 변에 묻었지만 그것마저 안 될 때는 달리는 기차 밖으로 버려야 했다고 한다. 소련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솔제니친도 그의『수용소 군도에서』연해주 한인들을 강압해서 이주시킨 이 같은 소련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난하였다.

신순남의 그림
오늘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각지에는 53만 명의 한인 동포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고려인’이이라 부르며 상당한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 한다. 이러한 수난과 비극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고 이를 그림으로 형상화 해낸 산 증언의 당사자가 바로 교포 3세인 신순남(현지 이름 : 니콜라이 세르게비치 신, 1928-2006)이다. 그의 나이 9살 때,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에 밀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까지 끌려와 던져졌다. 다행이 할머니의 뜨거운 교육열 덕으로 그는 타쉬켄트 아스트로브스키 연극미술대학까지를 졸업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세계 청년작가전’1위에 입상, 소련문화부 선정‘우수작가’휘장 수상, 1978년에는 우즈베키스탄 ‘공훈 미술가’로 선정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국내전시는 1997년 6월 5일부터 7월 15일 동안 국립현대미술관 1, 2전시실에서 열렸다. 한마디로 나는 그 진지한 경건의 무거움과 되살아나는 역사의 되살림 앞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민족 유민의 고통과 슬픔, 억울하고 아팠던 절규의 아우성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며 구르듯 들려오고 있었다. 꾸밈없이 순정한 예술혼과 역사의식으로 그린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힘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애도>(1980)는 죽음을 소재로 하여 유민들의 슬픔을 그리고 있다. 가슴을 치는 듯한 애통함이 화면에 가득하다.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다. 앞에는 시신이 놓여있고 드러나 있는 두 발은 나무 등걸 뿌리처럼 우악스럽게 단단히 굳어 있다. 그의 걸어온 길이 험난하고 힘겨운 노동의 길이였음을 말한다. 전면에 등장한 울부짖는 인물들은 가족들로 그 동안의 설움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감당을 못하는 듯하다. 한복을 입은 여인, 굴건과 상복을 입은 애도객, 앞에 놓여 있는 젯밥 등이 조선족의 장례풍습임을 보여 주고 있다. 망각으로 잊혀져 가는 우리민족의 수난사를 역사의 증언으로 남긴 그의 작업들은 역사와 미술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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