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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응로의 <집선봉>(1941)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20)
금강산, 조상의 얼 짙게 밴 역사의 산

분단 이전 금강산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오는 자들을 포근히 받아들이고 안식시키며 정신을 새롭게 하여 세상에 토해 냈다. 금강산은 민족의 자랑과 좌절, 은둔과 저항이 중첩된 곳이다. 겸재 정선이 이룬 진경산수 화풍의 소재적 근원이 금강산으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은 이미 지적되어왔다. 그 곳은 요컨대 우리 정신사와 시문, 산수화 등의 근원이자 이상 의식의 귀향처였다. 그러나 어느 결에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예술미감의 근거, 격조 높은 불교의 정토사상, 마음을 가다듬는 수행 정신들은 잊혀져 가는 듯하다. 더구나 관광지의 이미지로만 굳어 간다면 이것은 일제가 금강산을 관광 대중화 하려던 의도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의문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응로가 왜 1941년 그 시점에서 <집선봉>을 비롯한 여타 금강산 산수를 그리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화력이 그의 생애를 통해 이어지는 그림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였다.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이들의 금강산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 였으며 금강산 관광은 어떠하였는가에 있었다. 물론 이들에 대한 나의 탐색은 지극히 부족하였다. 우선 금강산여행자나 출판물이 1930년대를 전환점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총독부는 1929년 천연색판<세계명승-조선금강산교통대조감도>를 발행했다. 


이은상이 1932년 <신동아>지에 금강산 묘향산 기행문을 실었고 다음해에 홍난파가 <금강에살어리랐다>를 가곡으로 작곡하였다. 1935년에는 잡지 <금강산>이 창간되었다. 금강산철도주식회사 (1920년)가 철원과 내금강을 있는 철도를 개설코자 설립되었다. 1924년 철원과 금화시 구간을 개통하였고 그 후 1931년 7월 총 길이 116.6km를 완전 개통 하였다. 금강산 관광객이 1920년경에 연간 7백여 명에 불과했던 것이 1933년에 4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한 달여가 걸려야 했던 여행기간이 1주일 혹은 4박 5일 코스로 단축되었다. 또 이 무렵 활판인쇄가 활성화되어 신문 잡지, 출판물을 통해 금강기행이 새롭게 소개 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금강산탐승안내책, 관광지도, 스탬프, 관광기념품들이 만들어졌다.





이 무렵 이응로는 일본 유학중이었고 그가 귀국한 것은 해방된 해(1935-1945)였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그가 금강산을 그린 것은 일본체류 중 잠시 귀국하였을 때였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비록 일본에 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가슴 속에는 말릴 수 없는 민족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일본에서 금강산의 명성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그 예술 문화사적 가치를 십분 알게 하였을 터이다. 일본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 친일로 볼 수 는 없는 일이다.
<집선봉>은 산 전체를 조망하듯, 호방하지는 않지만 영산의 모습을 실경스케치 하듯 겸허하게 그렸다. 이는 겸재의 수직준법을 연상시키는 필법이다. 이 그림은 고암이 전통적인 수묵산수화의 기법에 머무르지 않고 동서양을 아우를 그의 앞으로의 화풍을 예감케 한다. 1941년 고암은 <집선봉>외에도 몇 작품을 그렸는데 대작 <외금강>, <총석정>등 이 있고 <정양사망 금강>은 웅장하기까지 하다. 그가 도불 후 파리에서 1966년에 그린 <몽견금강>이 있는데 이는 꿈에 본 금강을 일필휘지로 그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꿈 그림이 <집선봉>그림과 아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의 고국에의 그리움과 통일에의 열망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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