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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함창연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1957>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 (1)

거기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증언

그림을 만나는 일은 늘 새로운 경험이다. 그 중에서도 함창연의 ‘거제도’ (Etching+Aguatint, 41x39cm) 앞에 서는 순간 그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거기에 담긴 예술성과 역사가 나의 온 몸을 휘감아 돌았기 때문이리라. 그때 불연듯 역사를 안고 있는 그림들을 다시 조명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꿈틀 내 의식을 깨웠다. 물론 한 시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작품은 역사이다. 그러나 역사의 소재로 한 아우라는 그 자체가 사료이자 증언이다. 관련된 역사를 알고 보면 더욱 크고 깊게 다가오리라.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한국전쟁이 터진 50년 11월 27일이었다. 그 넓이는 360만평. 이 때문에 거제도-공화국이라는 말도 생겼다. 지금은 그 자리 거제도 신현읍 고성리에 수용소 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거기 수용된 전체 포로의 수는 17만 6천명. 그 안에 공산주의자, 비공산주의자, 중국군포로 여성포로까지 갇혀 있었다. 수용인원의 5배나 초과. 그러나 그곳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은 북한이나 미군측에서 누가 더 자기쪽 포로를 한 사람이라도 더 확보할 것인가의 또다른 전쟁이었다. 거기서 발생한 유혈사태와 폭력은 직간접적으로 이 문제와 연계되어 있었다.
51년에 시작된 휴전회담은 2년이나 끌었고, 그 핵심 쟁점은 포로를 어떻게 송환하느냐였다. ‘자동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의 공방전. 북한측은 포로들을 무조건 돌려달라는 것이었고 미군측은 포로들의 의사에 따라 자유선택을 주도록 하자는 요구였다. 이 문제가 타결되어 휴전협정이 조인(53.7.27.)되기 직전 6월 18일을 기해 이승만은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분리수용되어 있던 2만 7,389명의 포로를 석방해버렸다. 미국측과 상의없이 결행된, 휴전협정을 저지하려는 항거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연계되어 있는 듯하다. 대통령으로서의 국가보위를 위한 용감한 선택이라는 견해이다. 반면 포로송환문제로 지연된 휴전협상 때문에 30여만이 넘는 인명피해를 나게 했다는 비난이다. 그 이유로 자유의사로 남한에 남은 포로는 5만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작가 함창연은 북한의 자강 송원 출생(1933)이다. 판화가, 공훈예술가인 그는 1959년 바르샤바 미술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때 국제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귀국하여 35년간 평양미술대학에서 후진양성을 했다.
문제는 그가 거제포로수용소에 있었느냐이다. 본인의 추정으로는 그가 평양미술대학 시절 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 그때의 현장이 이토록 생생히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거제도를 소재로 한 작품은 이외에도 ‘거제도-학살’, ‘거제도-피난길’ 등 두 작품이 더 있는 것으로 안다. 판화기법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역량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이 판화를 보면 함창연과 함께 이쪽 동산에 올라 저 아래 포로수용소를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다. 조용히 내려앉은 듯한 천막들은 그때의 서러운 아픔을 담고 있는 듯하다.


반공 포로 석방 후 나머지 다른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던가? 그토록 끌어오던 정전협상은 반공포로 석방의 파고에도 불구하고 53년 7월 28일 조인되었다. 누군들 분단된 조국을 원하겠는가 반공포로석방은 통일 없이 다시 정착되는 분단에 대한 힘없는 자의 마지막 저항이었다고 보면 그것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일은 아니다. 그 일로 해서 미국은 이승만을 더욱 달래야 했고 그 대가성 보장이 한미방위협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포로송환의 후유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어느 쪽을 택했던 포로들 자신은 역사가 안겨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유엔군 쪽이 붙잡고 있던 13만 2천여명의 포로 중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한 포로는 6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는 공산군 쪽을 분명 놀라게 했을 것이다. 공산군측의 포로는 개전 초 6만 5천명에 달했으나 그들 중에서 유엔군 측에 제시한 실제 명단에 포함된 숫자는 1만 1천 559명에 불과하였다.
최종적으로 돌려보내고 돌려받은 쌍방 포로 교환 숫자는 이렇다. 유엔군측이 돌려 보낸 공산군 포로 7만 5천 823명(북한국 7만 183명, 중공군 5천 640명), 공산측이 돌려보낸 포로는 1만 2천 773명(한국군 7천 862명, 유엔군 4천 911명)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포로들도 어떤 형태로든 적에게 협력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여론도 국민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중국으로 귀환하기를 거부하는 중국군 포로 2만 여명은 대만으로 갔다. 한국에 남기를 원하는 공산포로 2만 2천명은 한국에 머물렀다. 공산측이 붙잡아 두었던 포로 중에서도 미군포로 21명, 영국인포로 1명, 한국인포로 325명은 잔류를 희망하여 송환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포로 21명과 영국포로 1명은 중국을 선택했다. 88명의 포로는 양편의 어느쪽도 선택하지 않고 제3의 길을 원했는데, 그 제3의 길이 인도행이었다.
88명 중의 출신배경을 보면 북한국포로 74명, 남한군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처음부터 인도를 택한 사람은 15명 뿐이었고 대부분이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립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런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멕시코 행(29명)을 원했으나 멕시코도 거절하자 북한군 출신 50명과 중국군 포로 출신 6명이 브라질로 떠났다. 이들이 왜 제3의 길을 택했는지 뚜렷한 이유가 밝혀지고 있지 않다. 아마 어떤 사상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 전쟁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을 성 싶다. 참 기구한 운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한 마디 첨언할 말이 있다. 이때 이들 북송 포로 중에 남한출신의 이쾌대가 끼어있었다. 그는 가족을 서울에 놔두고 북으로 간 것이다.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 떠난 이들은 어디에 무엇이 되어 고혼으로 떠났는지, 이 판화가 그 때 그 억울한 사람들의 초혼의 살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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