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3)박생광의 <명성황후, 1983>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 (3)

박생광의 <명성황후, 1983>아! 명성황후(1851-1895)


민황후, 민비, 명성황후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누구인가? 1990년대 이전까지의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어두운 쪽이었다. 일, 청, 러시아를 끌어들여 국난을 자초하고, 강한 권력욕으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결하며, 민씨척족세도정치를 주도한 총명하지만 부덕한 여인이었다.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푸닥거리로 국고를 낭비하여 재정을 바닥나게 했다는 비난까지도.
반면 새로운 평가에 따르면 앞서의 비난은 황후를 시해한 일인들의 덧칠하기이며, 식민사관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밀려오는 외세에 맞서 그들을 이용하여 국권과 왕권을 보위하며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대원군과의 관계도 그의 권력야욕을 적절히 견제하고 나라 문을 닫는 시대착오를 극복해냈다는 시각이다.
보다 객관적이었을 외국인들의 그녀에 대한 인상을 들어 보자.


호리호리한 몸매이며 까만 머리칼과 흰 피부가 인상적이었고, 날카롭고 재기가 번뜩이는 검은 두 눈은 지성적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창백한 얼굴에는 애수가 깃들인 듯했다.
- 이사벨라 비숍


명성황후는 위력적이며 지성적인 개성이 엿보였다. 조선을 지극히 사랑한 폭넓은 진보주의자로 중국고전은 물론 세계선진국들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갖고 있었다.
- 미국인의료선교사 언더우드 여사



민황후가 고종의 비(妃)로 간택되어 가례식을 올린 것은 1866년 3월 21일 화창한 봄날 운형궁에서였다. 그녀가 고아라는 점이 외척세력의 배제라는 권력 구도에서 유리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고종즉위(1864), 흥선대원군이 집권한지 2년만의 일로 황후는 16세 고종은 15세였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이후 7년(1873)뒤의 일이었다.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시대에 개방압력은 거셌다. 지금까지는 대청, 중국외교만 챙기면 큰 탈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일, 영, 미, 프랑스, 러시아가 앞다투어 조선을 그들의 영향아래두려했다. 더구나 국력은 이를 주체적으로 대응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반면, 외세를 거부한 척외척화도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었다.




1866년 프랑스해군함대 강화도 침공(병인양요), 미해군을 물리친 신미양요(1871)가 일어난 배경이다. 일본은 운요호사건(1875)을 빌미로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여 끝내 조선을 열었다. 이후 조선땅은 청,일간에 누가 우위지배자가 되느냐하는 세력각축의 장이 되었다. 임오군란(1882) 이후에는 청이 우위를 얻어내고 갑신정변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사연이다. 동학농민운동(1892-1894)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1894)은 그 세대결의 극점에 이른 폭발이었던 것이다.

민비와 일본의 대결은 청일전쟁 후 본격화되었다고 보겠다. 청일전쟁에서 청을 이긴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1895)을 통해, 요동반도와 대만을 활양 받고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토록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삼국간섭(러, 독, 프)으로 요동반도를 다시 되돌려 주도록 강요당하였다. 이때도 민비가 서울에 있는 러시아, 미국의 외교관들의 협조를 얻어 간섭적인 영향을 준 듯하다.

일본의 한계를 본 민황후는 소위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더욱 구사하게 되는데 러시아세력을 끌여들어 일본을 견제하자는 외교전략이었다. 민비는 외교에 깊숙이 간여한 중심인물이 되었다. 일본은 분노를 삭이면서 결국 자기들의 조선지배는 민비제거를 통해 가능하다는 폭압적 결의를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일본은 시해 1년전(1894.6.21.) 일본군 2개 대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침입을 할때도 왕비시해가 그 주목적이었다.(이노우에 가오루문서)

한영우 교수는 황후가 수구파나 급진개혁파로부터 비판을 받고 일본관변의 미움을 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황후가 자주적 대외관계를 지키고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음모의 진행은 이렇다. 조선에서는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도했지만 그 계획은 이미 이노우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는 일본원로회의의 동의를 얻어낸 일이다. 행동대로는 시바, 시로, 호리구치 구마이치, 아다치 겐조, 오카모토 등이 주도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낭인들이라고 불리지만, 통설의 깡패들이 아니고 하버드대학 출신, 차관, 한성신문사장, 작가 등 일본의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 행동대를 지원한 것은 일본군 수비대였고, 이들의 들러리를 서며 조연했던 이는 대원군과 훈련대였다. 훈련대란 어떤 성격의 군대인가? 갑오경장시 1895년 5월 궁중수비를 위해 창설된 군대로 일본교관이 훈련을 맡아 기실 일본공사관의 지휘 아래 있었다. 황후와 고종은 그들을 불신했기에 해산조치를 취하려 했고 이 때문에 미우라는 거사일을 10월 8일로 (당초 10월 10일) 앞당겼던 터이다.

대원군을 강제로 회유하여 유폐된 공덕동 아소정 별장에서 경복궁 강녕전으로 데려온 일이나 건청궁을 행한 3개 무리로 나뉘어 진행된 일본군 훈련대 작전 등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하자.

1895년 10월 8일(양력) 아침 5시가 좀 넘어 일본도로 무장한 20-25명의 사복차림의 일본인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찾느라 광란하였다. 당시 노스차이나 헤랄드지에 보도된 내용은 그 참혹성을 일부나마 드러내고 있다.


...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졌고, 흉도는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으며 칼로 왕비를 거듭 찔렀다. 놈들은 실수없이 해치우려고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을 살해했다. 그때 여시의가 앞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왕비의 얼굴을 가렸다.
- 유홍종, 명성황후이야기, 해누리, 363쪽



왕후의 침실까지 난입한 자로는 나카무라, 토오가쯔아끼,(藤勝顯), 데라자끼, 구니도모 등 낭인과 미야모토 소위와 미키 등 군인이 있었다고 최문형교수 (<명성황후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지식산업, 개정판, 238쪽)는 추리했다. 이중에 직접 시해범이 누구인지 미궁에 쌓여 있었으나 근래 한국취재진에 의해 밝혀졌다. 황후를 시해한 것으로 인증되는 그 칼이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쿠시다 신사에 보관되어 있음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기증자는 민비시해현장에 참여했던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로 기증관련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는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 이름이 적혀있음이 확인되었다. 전체 길이 120cm, 칼날 90cm. 16세기 일본의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이 만든 명검이다.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弧(늙은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새겨져 있다. 1908년 기증.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그는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전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6시경 황후는 절명하였다. 겨우 45세의 나이에 일국의 황후가 침실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된 통한과 오욕의 순간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울컥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죽은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뒷 녹원숲속으로 옮기고 장작더미를 쌓아 석유를 뿌려 불 질렀다. 시신인들 다 연소했을까. 일부는 땅에 묻고 얼마는 향원지에 버리고 나머지는 근처 우물에 던졌다고 한다.

박생광의 “명성황후”를 대하면 우선 불의 바다와 같은 불꽃의 뜨거움에 온 몸이 댈 것 같다. 중심에 향원정이 거꾸로 놓여 있는 것은 나라가 넘어지는 비운의 국난이자 민비가 지탱하려 혼신을 다한 왕조와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말발굽, 사무라이 군도의 살기등등한 일인, 좌측상단의 경악하며 슬퍼하는 흰옷입은 백성, 하단에 일본의 폭도범죄를 막지 못한 구한말 병사의 슬픔이 찢어질 듯 울부짖는다. 놀랍게도 민비의 얼굴은 초월각득한듯 평화롭고 머리에는 광배까지 둘렀다. 하얗게 흐트러져 피어있는 연화는 민황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모습이다. 유연한 선을 이리저리 휘둘르듯 그려 마치 그림전체는 아침 붉은 햇살을 받은 동해처럼 일렁거리며 살아있는 듯하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한순간 내가 앉아있는 방안이 모두 붉은 듯한 착시까지 느낄 정도다.

이 그림을 끝내고 박생광은 이영미술관장 김이환에게 ‘이 그림이야말로 한국의 게르니카다. 폭력적 외세에 수난 받은 민족을 그렸다는 점에서 ...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할만한 긍지를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언젠가 기회가 되면 피카소의 고향 스페인에 이 그림을 꼭 선보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다(김이환, 수유리 가는 길, 253쪽). 실제로 이 작품은 스페인에서 전시되어 그들을 사로잡았으니 내고의 한도 풀렸을 듯하다. (같은 책 250쪽)

본인은 박생광(1904-85)이 이 민족적 비운의 명성황후를 그렸다는데 역설감을 느낀다. 그는 식민지 아래서의 미술교육을 받았고, 한때 왜색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일본에 정착했더라도 어쩌면 그곳에서 충분히 자리 잡을 역량의 작가이다. 하지만 한국의 화단에서 가난과 나름의 소외를 겪으며 꾸준히 자기모색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그림의 변화과정을 보면 이를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한 고뇌와 내면에 살아있는 민족, 역사의식이 끝내 전통정신과 현대미술, 인도에서 얻은 영감과 축적되어온 그림 역량이 화산처럼 터져 나와 그림득도의 길에 들어섰고,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성격의 그림을 창출해 낸 것이다. 그는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는 경지에 끝내 이른 것이다. 이점에서 그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감히 나는 말하련다. 그의 동향인 소설가 이병주는 그를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인물에 비유했는데 그것은 뒤늦게 이룬다는 뜻이 아니란다. ‘대재(大材 )’ 또는 ”큰 인물은 늦게까지 성장한다”는 말로 해석했다. 요컨대 “나이가 들면 성장이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아도 늙어도 성장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이는 내고에게 딱 적중한 말이다. 그에게 예술은 일정한 질서나 형식이 아니었으며 그 자신 ‘틀 속의 인물이 아니라 틀 안팎을 제멋대로 노니는 천진무애의 인간“이었다(하인두).

명성황후 시해장소 건청궁을 찾아 나선 날은 유난히 화창하고 하늘은 푸르렀다. 경복궁 맨북쪽 한적한 곳, 자료에 따르면 건청군은 훼파되고, 시해지에는 이대통령이 쓴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侯 遭難之地 ) 표지판(1954년 설치)이 있다가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건청궁 자리에는 작은 돗배한옥이 세워져 그 안에 명성황후 시해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 비치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장에 간 나는 깜짝 놀랐다. 건청궁이 복원되어 10월 8일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청에 대해 물었더니 단청에 대한 근거 자료도 아직 못찾았지만, 민간 사대부집 형식을 선호했던 점을 감안하여 단청을 하지않기로 했단다. 담 너머로 보이는 장안당 그 뒤의 곤녕합, 옥호루가 가슴을 치듯 다가왔다. 바람에 비꺽거리는 대문소리조차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려 나를 오싹하게 했다. 까치는 여전히 하늘을 나는데 석양의 향원정은 어찌 그리 슬퍼 보이는지...

죽음도 억울한데 황후는 그날로 서인으로 폐위되었고, 왕후는 다시 빈(嬪)으로 승계되더니 비등하는 여론에 못이겨 11월 26일 폐위는 취하되었다. 왕후사망이 발표된 것은 12월 1일에서야 였다. 고종은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1919년 세상을 뜰때까지 황후를 다시 맞이하지 않았다.

민비시해에 대한 책임자 공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크게 나누어 미우라 대원군 공모설, 주일공사 미우라 고로의 주모설, 대원군과 훈련대의 공모설 등이 제기되어왔다. 요컨대 어느 쪽이든 일본은 자기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선긋기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문형은 민왕후 시해의 주모자는 통설처럼 주한공사 미우라가 아니라 그의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노우에의 시해주도와 일본각의의 대한강경정책결의라는 두 사실에 있다고 보고 이들의 입증을 통하여 민왕후시해의 주범은 일본 정부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위안부 문제를 끝까지 부정하고 있는 오늘의 일본을 본다. 그들은 과거의 청산을 통한 새로운 출발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참담한 일이 겨우 100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들의 이중적 모습이 더욱 뚜렷이 살아나 마음을 어둡게 짓눌려 옴을 어쩌랴. 작가 박생광은 민비가 죽임을 당한지 10년 뒤, 1904년생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