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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최덕휴의 <운현궁 1987>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 (4)


근대사의 풍운서린 운현궁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운현궁 ④출구로 나오면 어딘가 도심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난다. 그것은 간결한 용마루를 이고 서 있는 운현궁의 그윽한 품격 때문일 터이다.

운현궁은 대원군의 사저였으나 고종 즉위년 1863년 9월 3일부터 운현궁이라 불렸다. 고종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12세까지 머물렀다.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후에 노안당, 노락당을 짓고 이로당을 증축하였다. 노안당은 사랑채로 대원군의 일상 생활 처이며, 파란만장의 생을 마쳤던(1898) 곳이다. 노락당은 규모가 가장 큰 중심 건물로 행사장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고종의 가례도 여기서 치렀다. 안채에 해당하는 ㅁ자형의 금남의 공간은 곡절 많은 대원군가의 여인들의 한과 사연이 굽이굽이 서린 곳이다.

대원군의 생애처럼 운현궁도 영욕을 겪었다. 대원군이란 명칭은 아버지가 왕이 아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아버지에게 붙여진 존칭이다. 조선시대 네 분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살아있으면서 이 칭호를 누린 이는 흥선 대원군 혼자였다. 그의 권세가 충천할 때는 담장의 길이가 수리나 되고 4대문의 웅장함까지 갖춰 궁궐에 버금갔다. 그 터 크기는 지금의 삼환기업, 구 TBC 방송국, 일본 문화원, 교동 초등학교, 덕성여대 캠퍼스에 걸칠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일제 시대는 황실재산으로 몰수되었고 해방 후도 미군정 등을 거치면서 그 소유권에 기복이 많았었다. 그 와중에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겨 대부분 타인의 소유가 되고 건물은 훼손되어 갔었다. 서울시가 인수(1993) 보수(1997)하여 오늘의 그나마 자태를 지키고 있다.

운현궁은 왕족이 살았던 궁(宮)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건축사적으로 한옥의 구조와 전통을 가장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사라진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역사가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그가 김씨 척족세력의 서슬 퍼런 위압 아래 어떻게 살아남았고, 그의 둘째 아들 재황을 고종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조대비(현종의 어머니)와의 치밀한 밀약을 했던 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소설로 생생히 재연시킨 ‘운현궁의 봄’은 지금 읽어도 김동인의 문학적 천재성에 몸을 떨게 한다. 물론 그가 쌀 걱정, 설 지낼 걱정을 할 만큼 궁핍했느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3차례에 걸쳤다. 제 1차는 고종 원년(1864)부터 실각(1873)때까지 10년이다. 이때는 왕의 대리인으로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다. 조세제도 개혁,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인사행정 혁신 등의 전제 왕도정치 실현, 미,프,일에 대한 강력한 쇄국 대응, 천주고 박해 등이 있었던 시기이다. 2차는 임오군란(1882)으로 일어난 혼란의 수습을 위임받아 집권하였으나 33일 만에 청나라에 납치되어 보정부에서 3년이나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3차는 동학농민운동시 일본군의 왕궁침입으로 세운 내각을 맡아 4개월 집권(1894.7.23~11.22)하였다. 그 어간에도 2번이나 고종 폐위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전한다.

위기 때마다 그가 재등장한 것은 격변 속에 그가 차지한 위상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의 집권의지는 청과 일에 의해 이용당하였으며 이를 역이용하려던 대원군의 시도는 곧 좌절되곤 했다. 민황후와의 대립은 그의 허약한 권력기반을 허물기가 일수였다. 그럴 때마다 운현궁과 아소정에 격리되어 유폐되는 세월을 살아야 했다. 임종 시에 고종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으나 고종은 끝내 나타나지 않은 매정의 별리를 해야 했다. 그의 삶은 권력의 위세와 그만큼의 허무를 절감케 하는 영욕의 표상이었다.

그는 보수정치가였는가, 진보정치가였는가. 일반적으로 그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 쇄국, 천주교 박해, 민비와의 대립 등에서 부정적이며 보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서원철폐, 인재 고루 등용, 세제개혁 등은 실사구시의 진보적 성향도 띠고 있으며, 쇄국도 집권초기와 후반의 태도 변화를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일본을 이용하고 러시아 측에 접근한 것을 권력욕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인지 이태진 교수는 그의 동경대 한국사 특강에서 ‘어쩌면 대원군은 선 개혁 후 개방화 정책을 방침으로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대원군 자신의 노욕에 가까운 처신도 문제지만, 안으로 대응의 힘을 갖추지 못한 채 강한 외세를 맞이한 우리 근대사 비극의 한 단면을 그가 반사하고 있음 직 하다. 당시로는 그만한 통치 권력을 행사할만한 인물도 찾기 어려웠을 터이다.
대원군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조선 오백년 역사에 조선을 사랑할 줄 알고 왕가와 서민, 정치가와 백성,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참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인 우리의 위인….
- 소설가 김동인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대립하던 시대는 조선의 역사상 대전환기에 속하는 중요한 시기였으나 두 사람의 권력 투쟁과 대립이 국가를 존망 위기 빠뜨려….
- 소설가 유홍종

흥선 대원 이하응은 10년을 집권하는 동안 공과 과가 반반이었다. …… 나이 들수록 경륜이 쌓여 이름이 외국에까지 알려 졌으며 조야가 그를 대로(大老)로 의지하였다. 그가 죽으매 모든 사람이 슬퍼하였다.
- 황현, 매천야록


당시 주한미국공사 허아드(Heard Augustine)는 그의 보고 내용에서 대원군을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 조선정계의 마지막 실력자’라고 했다. 민씨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그는 백성들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었다고도 첨언하였다. 구한말의 문장가 김윤식 또한 ‘흥선대원군은 시화에 능하여 마음에 내키면 오묘한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려 이름을 떨쳤다.’라고 썼다.

대원군이 회갑을 맞아 화가 이한철과 이창옥이 영정을 그리고 한홍적이 표구한 초상화를 보면 앞서의 그의 특성들이 잘 내포되어 있다. 늠름하고 자제력이 있어 보이며 의중을 숨기면서도 뜻을 이룰 줄 아는 민첩한 행동 인이자 대지략가다운 풍모이다. 55세에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도 몰한 79세에 이르기까지 조선근대사에 풍운의 바람을 거침없이 일으키고 있었던 그의 인물됨을 짐작케 한다.




그가 파란만장의 삶을 마친 것은 1898년 2월 22일 그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가 사망한지 46일만의 일이었다. 그의 장지 또한 그의 생애만큼 기구한 이장을 거듭했다. 마포의 공덕리에서 문산 운천리로 다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창현리로 옮겼다. (1966) 그곳 묘역에는 맏아들 재면, 장손자 준용, 증손자 우(鍝)의 무덤이 함께 있다.

최덕휴(1922~1998)가 그린 ‘운현궁’(1987)은 기실 운현궁에서 양관(洋館)이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는 운현궁 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이 있고 주변 소나무가 우거진 터였다. 일제 강점 후에 운현궁의 새 주인이 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1870~1917)이 일본에 있을 동안 일본 건축가 가타야마 도오쿠마(1853~1917)에게 의뢰 설계, 착공 1907~1908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타야마는 일본의 궁성 건축을 선도했고 조선에서도 1908년 용산의 조선 총독부 관저 등 근대 서양식 건물의 설계도 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왕족 귀족에게도 일본식의 ‘오작서훈제’를 시행했는데 대원군 가를 회유하기 위해 이 건물을 지어주었음직하다. 그러나 이 양관에 순경 40여명을 파견하여 주둔시켰다고 하니 감시의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네오바로크(Neo-Baroque)풍의 이 건물은 그림에서 보듯이 지붕 양편의 피라밋형 두 대칭물과 중앙의 둥근 지붕이 특유의 맛을 내고 있으며 지붕 상부의 철제 조형물이 섬세한 장식성을 드러내고 있다. 발코니 부분의 양편 2련의 아치 창문과 중앙 부분의 기둥, 따로 달아낸 현관이 개성적이다.

8.15 해방 후 건물은 미 군정청에 접수되었고,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한국 방문시 이곳을 영빈관으로 썼다. 지금은 덕성여대 소유의 재단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덕성여대 교표 배지에 이 건물이 그려져 있다.




최덕휴는 오랫동안 미술교육의 선도자였지만 젊은 시절 광복군으로 입대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싸웠던 경력의 소유자다. 고향은 충남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 휘문중 시절 2학년에 은사 장발 선생의 영향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일본 동경 미술학교에 진학하여 일본 동광회 청원회전에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작가이기도하다. 그가 “나의 일생에서 광복군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듯이 그는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다. 1943년 졸업도 6개월 앞당기고, 11월 20일에는 군복을 입혀 최전선을 내보내졌다고 한다. 중지 파견군 일본군 64사단에 배속되어 양자강 변에서 초년병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에 있는 독립군에 합류키 위해 필사의 모험을 감행했었다. 이는 일만 리 길을 걸어야 하는 그의 말처럼 망망대해 뜬 일엽편주 같은 죽음의 도전이었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명으로 제 3구대 제 1지역 책이 되어 대일작전에 참여했다. 1945년 8.15 일본의 항복 뉴스도 9월에야 알아 46년 남경으로 나와 상해를 거쳐 귀국길. 1950년 6.25가 있을 때도 군에 입대 육본 국방부 등에서 56년 5월까지 복무하였던 투철한 정신의 소유자.

그가 운현궁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이 양관의 그림을 통해 역사의 회고적 감상에 푸욱 젖었으리라. 그는 이 작품 외에도 서울역, 성공회 건물, 대한의학원 같은 역사성을 띤 풍경들을 자주 그렸다. 그의 그림은 초기 고갱과 같은 후기 인상파적 느낌을 주는데, 실제 그는 타이티를 방문하기도 했다. 세월이 가면서 풍성한 색을 넓게 자유롭게 그리고 운필을 휘두르듯이 포비즘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우선 그의 그림을 보면 편안하고 다감하여 무욕의 마음을 갖게 하는데, 그 자신이 화실보다 자연 앞에 서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의도적이기 보다 그림 그리는 동안의 감흥을 좇아 붓 가는 대로 맡겼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대학 재직 시 나는 햇병아리 교수, 법주사 교수연찬회에 갔을 때 새벽녘인데 호텔 뜰 앞에 나와 화폭을 펴고 그리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본인이 경희대학교 중앙 박물관장 재임 시 그의 유족이 기증한 유작들을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인연이 새롭다. 같은 해 미대에 미술관이 지어져 최덕휴 기증 작품전이 첫 전시로 열렸음을 모두 기뻐하였다. 시간 속에서 대원군도, 민황후도, 작가도 우리 모두는 역사의 무대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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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한국근대사의 재조명, 국학자료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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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원, 풍운의 한말 역사 산책, 한국문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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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운현궁 생활 유물Ⅰ, 서울역사박물관, 2003
신영훈, 운현궁, 조선일보
최덕휴, 최덕휴 화집,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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