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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겸재 정선의 <송파 진도 C.1740>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7)




겸재 정선의 ‘송파 진도’ (C.1740)

오늘도 들려오는 역사의 솔바람소리-남한산성



남한산성에 가면 역사를 물씬 느낀다. 비바람에 수백 년을 씻긴 성벽과 그 스산한 솔바람 속에 민초들의 목소리가 묻어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남한산성을 찾는다. 그리고 가도 가도 다시 가고 싶다.

조선의 영조(1724~1776)왕 시대 문예부흥의 주역인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송파진도(송파 나루터 그림)’에서 남한산성을 만나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림 하단에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위에는 한가한 돛폭의 범선이 떠가고 있다. 아마 그 안에 정선 자신이 타고 있는지 모르겠다. 좌측 하단에 세척의 배들이 서 있는 곳은 아마 뚝섬, 살곶이 나루터로 보인다.

중앙부에는 당시 송파 신천나루 광나루들을 관리하던 관서(?)와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림 상단에는 유연하면서도 육중한 무게의 남한산이 자리 잡았다. 그 우단에는 산성이 아주 가깝고 뚜렷이 길게 그려져 있고 지금처럼 푸른 소나무가 창창히 우거져 있어 솔바람이 불고 있는듯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성벽 중앙부분에 서문 누각이, 우측으로 눈을 옮겨가면 청량산 언저리 수어장대의 누각이 보인다. 좌측 성벽끝단은 아마 연주봉옹성인듯 하다.





당시 송파나루터는 한강의 3대 나루터 중의 하나로 광주땅이자 영호남으로 가는 왕래 길목이며 강원도로 이어지는 통로였기에 아주 붐볐다. 기실 오늘의 한강이남 가까이에 있는 땅은 거의가 당시 광주에 속하였다. 강남, 강동, 송파, 하남, 성남, 분당, 판교가 모두 하나의 광주로 묶여 있을만큼 컸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송파장에는 대규모 개인 도매상가가 생겨 상설매장이 되다싶이 했으며 그 기세는 서울 종로의 육주비전에 타격을 줄 정도였다. 송파나루에는 관선(官船)을 9척이나 배치하여 오고가는 승선 행인들을 기찰하였다. 19세기 홍경모는 그의 책『남한지』에 각 나루터에 배가 몇 척 매어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광진 7척, 신천진 2척, 삼전도 6척인데 송파진은 25척이라고 적고 있다.

송파진은 매립되고 변형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잠실대교 남단이 출발지점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그곳까지 갈때는 도성을 나와 왕십리를 거쳐 살곶이벌 뚝섬이나 화양정, 그리고 보다 북으로는 광진 나루터를 이용하였다. 남한산성으로 갈 때는 지금의 송파대로를 거쳐 복정역 근처에서 산성역쪽으로 꺾어져 남한산성의 남문으로 가는 통로로 이어진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1636) 피난시 살곶이 쪽에서 송파를 거쳐 이 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길은 지금의 오금동을 지나 거여 마천 동쪽으로 해서 가파른 산등성이를 올라 서문에 이르는 길이다. 인조가 산성에서 47일을 지탱한 후 1637년 1월 30일 그 추운 북풍한설에 손발이 얼며 미끄러지며 삼전도의 청 태종에게 항복하러 가야만 했었다. 그때는 이 서문을 나서 거여 마천을 지나 오금동(梧琴洞)을 거쳐간 듯하다. 그래서 인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다가 하도 오금이 저려, 그곳에서 쉬어가자고 해서 오금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웃지못할 민간설화도 전해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건설한 잠실대교나 천호대교 등이 당시 한강의 나루터지역과 거의 동일하게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그 지점의 강폭이 가장 좁다거나 물살이 약하다든가 하는 장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하니 옛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 떠올려진다.

청 태종이 이끈 10만여 명의 병력, 그리고 성내장병은 고작 13,800명, 식량은 50여일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왕과 병사들의 엄동설한의 동통보다 심한 고통은 상상을 넘는 것이었으리라.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김상헌의 논쟁을 명분과 실리라는 양단논법으로 보는 것을 극복할 만큼 우리의 역사의식은 성숙하지 않았나 싶다. 누구를 옳다 그르다 탓할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느 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이었는지, 어떤 다른 대안이 있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그들 모두 붙잡혀 가서도 감옥에 갇히고 당당했던 점은 모두 양심의 소신에 따라 행했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김훈은 그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 라고 쓰고 있다. 사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어찌 쉽든가?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이다.

무지하고 준비없음으로 자초한 병자호란(1636)의 최대의 피해자는 찢기고 파쇄된 백성들이다. 그동안 너무 치자중심 왕조중심으로 남한산성의 비극을 해석해오지는 않았는지. 치욕의 땅, 패전의 땅이라고... 그러나 백성은 예나 지금이나 넘어졌다 일어선다. 그들의 집은 약탈당하고 청나라에 징병으로 바쳐지고(어느 때는 12,500명이나 요청됨), 소는 모두 청나라에 뺏기어 농사지을 소가 없어 몽고까지 가서 사와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일어섰고 청군에 의연히 맞서 싸운 것도 민중이었다.

겸재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양천 현령으로 발령(1740)받고 관운과 그림이 크게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양천은 지금의 양천구 가양동에 현아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강화만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풍경을 선유하듯 감상하며 한껏 그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렸던 것 같다. 한강의 명승들을 그려 모은 것을 묶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상하 두 책이 되니 지금 간송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 화첩에는 팔당의 ‘우천’, ‘압구정’, ‘광진’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송파진도’가 포함되어 있다.

겸재는 명문 사대부 가문이었으나 쇠락한 영반가로, 가난과 당쟁에 묻히며 과거길이 막히자 그에게는 농사와 화가길 외에 선택의 길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천부적인 화가적 천재의 역량은 그 길을 가게 했고, 끝내는 영조왕의 그림 스승까지 되어, 인생 후반에는 화려한 관직에 그림 그리는 여유까지를 만끽하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 성리학에 몰입하였으며 그로인해 조선고유의 실경 산수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최완수는 그를 가히 ‘화성(畵聖)’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지난지 100여년이 지난 후 이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송파진도를 그리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중간을 생략하고 남한산을 크게 앞당겨 그리고 있다. 더구나 남한산성을 아주 사실적으로 눈에 잡힐 듯이 그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주화파 최명길(1586~1647)은 겸재의 조부와 이종사촌 남매간이었다고 하니 단순 풍경화로서의 산성의 느낌만은 아니었으리라.

겸재의 ‘금강산도’를 비롯한 ‘쌍계입암’, ‘청풍계’, ‘인왕제색’의 필력과 기운, 그 완숙미에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경교명승첩』을 그릴 때는 모든 것이 안온하게 원숙 속에 묻힌 것 같으며 필력은 조용하나 운동감이 있고 색감은 청색조를 살려 강과 자연풍광의 조화를 평화롭게 이루어 내고 있다. 그의 나이 65세 무렵이었다. 다시 생각하면 도시개발에 밀려 이들 아름다운 나루터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일은 너무 안타깝다. 그것들을 살려 놓고도 개발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우리의 단견이 못내 부끄럽다.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대화만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가르침을 힘입어 미래를 다시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 점에서 역사는 홉스 봄이 말한 것처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만이 아니라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만들고 또 제한하는 힘을 갖고 있다.

남한산성에서의 항복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제국을 건설하기 전에 라틴 언덕에서 얼마나 처참한 패배를 당했는지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패배는 우리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패배가 진정한 패배가 되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힘으로 전환되지 못할 때이다. 역사는 짧은 눈으로 보면 승리자의 역사인 듯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실패야 말로 역사를 더욱 숙고하고 체득하게 하는 근거가 되어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송파의 산대놀이도 그렇지만 우리의 판소리는 슬픔의 한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해학과 슬기와 끈기와 짙은 인내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살풀이를 보라. 고혼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끝내는 마음의 평화로 이끌지 않던가.







참고문헌

성남문화원, 남한산성의 현재적 재조명, 성남문화원, 1996 (1996.10.10)
최완수의 진경시대(2), 돌베개, 1998
토지박물관, 남한산성발굴조사서
남사모, 남한산성 역사 문화강좌, 남사모, 2002
김영상, 서울육백년, 한강ㆍ한강유역(5). 대학당, 1996
반영환, 한국의 성곽, 대원사, 2002
김성한, 역사기행(상) 길따라 발따라, 사회발전연구소, 1983
전형대ㆍ박경신 역주, 병자일기, 예전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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