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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자연과 예술의 향기속으로-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김상채


'인상주의 화가들 시대로의 여행' 오베르 미술관. 상설전시

1890년 7월 27일, 평화롭고 작은 시골마을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은 고통스럽고 지난 했던 한 예술가의 삶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비극적 사건 이였지만 결과적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혼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 이였다. 더불어 근대화의 언저리에서마저 밀려났던 이 농촌마을이 예술 순례지로서 언약 받게 되는 계시이기도 했다. 짧은 생애동안 늘 경제적 궁핍함에 시달리며 천형의 간질병을 안고 고군분투하며 살아야 했던 이방인, 그러나 끊임없는 예술적 열정으로 자신의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화가, 육신은 떠났지만 작품으로 이 시대에 다시 부활한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작가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전에 고통과 방황의 질곡 속에서 무명으로 사라졌지만 현대인들에게 신화가 된 빈센트 반 고흐, 그가 살았던 삶의 흔적과 예술혼이 묻어 있는 작품의 현장들을 찾아 보기위해서 그의 궤적을 따라서 가보았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신학교의 입학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하는 바람에 그의 신에 대한 열정과 종교적 신심은 예술을 향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이 철저히 독학으로 모든 것들을 익혀야만 하는 고난의 과정 속에서도, 결국 그는 위대한 예술가로 세상에 재림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따라서, 또는 그의 흔적을 따라서 순례 길에 나서고 있다.
뽈 세잔(Paul Cezanne), 뽈 고갱(Paul Gauguin), 빈센트 반 고흐는 흔히 미술사에서 후기 인상파 화가들로 일컫어 진다. 특별히 어떤 이즘을 대표하는 용어가 아니라 인상파와 구별 짓기 위해서 명명했던 미술사조 이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즉 1874년에 첫 용어가 탄생하여 약 10여년 동안 지속했던 프랑스 미술흐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세계미술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단초를 제공했던 미술사상 혁명에 가까운 것 이였다. 본래 1874년 제1회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작가 협회 전'때 비평가인 루이 르로이가 전시 비평문에서 비양 거리는 조롱적인 표현으로 사용했던 것이 이후 한 시대의 미술사조를 일컫는 용어로서 정착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이전의 사실주의나 낭만주의와 같은 표현양식으로서 이즘을 대표했던 것과는 달린 인상주의는 그 형성부터가 자연발생적 이고 미학적 주장을 들고 나왔던 것이 아닌 제 3자에 의해서 붙여진 명칭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는 근대회화의 혁신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기존 회화의 개념을 바꾸어 버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인상(印象)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감각적 자극에 대한 중추신경의 즉각적인 심리적 효과'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한편에서 인상파에 대한 개념을 일정부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물의 표면에 비친 빛(자연광선)의 효과에 대한 본질을 추구하고 눈에 보여지는 빛의 효과를 어떻게 캔버스로 옮길 것 인가에 대한 것 이였다. 즉 다시 말해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태양광선 때문에 변화하는 사물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서 화면에 옮기는 것에 대해서 열중했다. 이것은 기존의 고전적 개념의 회화에 대한 개념을 깡그리 무시하는 혁신적 발상이였다. 그 동안 회화는 초상화와 기록화, 풍경화 등의 대상물을 재현하는 기능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는데, 1835년경 다게르에 의한 발명된 사진으로 인해서 더 이상 회화가 재현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화가들은 전통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화가들은 새로운 개념의 회화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빛에 따라 변하는 대상물의 포착과 강렬한 색채, 바로 사진에 대항하는 경쟁력을 인상파 화가들은 발견했던 것이다.
인상파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 화파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에두와르 마네(Edouard Manet), 인상파 운동을 주도했던 모네(Claude Monet), 그리고 르느와르, 드가, 피사로, 시슬리, 등이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이다. 또한 빈센트, 세잔, 고갱 등도 한때 인상파의 영향아래서 작업을 했던 작가들이다.



19세기 파리는 여전히 세계 미술 중심지로서 청운의 꿈을 품은 미래의 예술가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 이였다. 빈센트 또한 그 수많은 예술가처럼 파리는 자신의 예술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신세계와 같은 곳 이였을 것이다. 더욱이 파리에는 자신의 경제적 후원자이자 평생동안 668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예술적 교감을 나눈 동생, 테오도르 반 고흐가 있었기에 이 무명의 가난한 화가는 주저없이 파리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난한 이방인에게 파리는 냉담했으며, 빈센트 또한 자신의 곤궁한 생활과 건강상의 이유,그리고 새로운 작업환경을 찾아서 남 프랑스의 아를르로 떠나고 만다.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과 아름다운 쪽빛 바다가 있는 지중해에 인접해 있는 남불의 작은 도시, 이미 로마 시대 때 남불의 거점도시로서 로마인들이 활용했던 아를르는 주변의 세계 연극제로 유명한 아비뇽과 로마시대 최대의 원형 극장이 잘 보존된 님 등과 더불어 로마 유적들이 잘 보존 된 지역이다. 누가 지중해의 바다와 남불의 햇살을 보지 않고서는 프랑스를 다 보았다고 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렇다. 르느와르, 피카소, 마티스, 샤갈, 그리고 한국의 보신탕 문화에 늘 상 시비를 거는 브리지토 바르도를 비롯한 최근의 수많은 연예인과 예술인들 또한 남불에 하나쯤 별장이나 작업실을 마련하고 있지 않던가. 이렇듯 남불의 태양은 가난한 빈센트마저 유혹하고 있었다. 새로운 작업환경과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찾아 내려간 아를르, 그곳에서 화가들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고갱과 함께 작업하고자 만들었던 작업실 '노란집'은 그가 염원했던 예술가들을 위한 공동 작업실 이였다. 라마르틴느 광장 앞에 위치한 이 작업실은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당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전히 고흐는 이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 1888년 12월 23일 고갱과 다투고 난 뒤 스스로 귀를 자르고 고갱이 떠나버리자 절망에 빠져 고독과 사투하며 고립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다시 정신발작을 일으켜 시당국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유치된다. 더 이상 희망도 없는, 불운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빈센트는 다행스럽게도 시립병원 의사인 레이의 친절하고 정성스런 보호로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감사의 표시로 의사 레이의 초상화를 이때 그려서 기념으로 건냈다. 당시 이 초상화를 본 레이의 어머니는 질색을 하며 시골집 구석에 쳐박아 두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닭장의 구멍을 막는데 쓰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나는 한 세기 후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그래서 사진 같은 흡사함을 추구하는 대신 색깔을 통해 성격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전히 고통과 불안으로 점철된 아를르 시절 이였지만, 주변의 풍경과 이곳의 기후에 매료되어 정신적으로 커다란 해방감과 함께 작품제작에 대한 열정이 고조된 상태였다. 주변의 자연풍경과 마을 사람들, 특히 이시기에 그렸던 작품 '해바라기'는 본격적으로 인상파로부터 탈피하는 고흐의 독창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노란색의 의미는 태양의 상징이자 고흐의 정렬의 상징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지금은 문화센타로 바뀐, 그가 한때 수감치료를 받았던 아를르 시립정신병원의 정원 풍경은 남불의 강렬하고 화려한 햇살아래 드러난 자연의 살아 있는 색채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남불의 찬란한 색채와 눈부신 햇살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밤의 카페'의 현장에는 고흐의 흔적과 예술혼에 취한 여행객들이 지난 시대를 더듬고 있다. 론강 아래 쏟아지는 별빛의 환상을 담아 낸 '별이 빛나는 밤', 고갱과의 공동 작업실이였던 '노란집',그리고 아를르 시내에서 30여분 거리에 있는 '아를르 다리'는 그 시절 그 모습으로 한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많은 답사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를르는 원형 극장과 원형 경기장 등 수많은 로마시대 유적들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중세 성곽, 골목 골목 천년의 세월들이 묻어 있는 아름다운 중세의 건물,그리고 매년 5월과 9월의 투우대회, 7월의 국제 사진전 등 많은 볼거리와 문화행사가 있지만 여전히 고흐의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 드는 순례자들로 인해서 1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남불의 또 다른 고흐마을이다.
파리에서 약 30여 킬로 떨어진 교외, 조그만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굳이 우리말로 풀자면 우아즈 강가의 오베르, 즉 오베르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약 6천명의 인구를 가진 아주 작은 마을인 이곳에는 고흐 때문에 일년에 인구의 세배가 넘는 2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 들고 있으며 이것은 이 마을 수입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840년대 기차가 개통되면서 도시민들의 교외 나들이가 훨씬 수월해졌다. 특히 첫 노선이 노르망디 선이 되면서 노르망디 쪽으로의 야외 나들이는 일반인들 뿐만이 아니라 화가들도 이용하게 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야외 작품제작 활동은 파리 서북쪽에서 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네의 '루앙대성당'이 있는 루앙과 모네의 '수련'연작을 그렸던 지베르니, 그리고 노르망디 해변가와 르 아브르, 옹플뢰르, 등의 주변 항구 도시들이 주로 인상파 화가들이 작품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장소들이다.

오베르 역시 파리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1853년 인상파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도비니(Dauviny:1817-1878)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작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던 마을이다.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피사로와 도비니, 그리고 코로가 오베르를 자주 왕래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고, 세잔느 또한 약 18개월간 이 마을에서 작업을 하면서 여러 화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마을이다.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리적 환경과 기차의 개통으로 접근성의 용이함, 그리고 우아즈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에서의 조망권, 특히 당시의 가난한 화가들에게 파리에 비해 값싼 작업실과 생활비 등은 크나큰 매력 이였을 것이다.
아를르에서 올라 온 고흐는 그 해 5월 20일 오베르에 도착해서 시청 앞에 있는 라부여관에 하루 3.5프랑의 하숙비를 지불하면서 머물게 된다. 1층의 식당과 2층의 주인 거처, 그 위에 다락방 형태의 3층에 위치한 고흐의 방, 두 평이 채 안되는 이 작은 공간에서 7월 29일 새벽 1시에 긴 고통, 짦은 삶을 마감한다. 라부여관은 고흐의 예술과 편지모음집을 읽고 감동을 받은 벨기에인이 사들여 19세기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해서 현재 반 고흐의 집이라 명명하여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70여일간 머물렀던 오베르에서 고흐는 70여점의 유화작품과 수십점의 판화와 데생작품을 그렸으며 특히 지금도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현장들이 19세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베르는 19세기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한적한 거리와 시간이 정지된 듯한 나른한 분위기, 그리고 시골사람들의 친절하고 건강한 얼굴들, 훼손되지 않은 주변의 자연풍광들, 오베르에 오면 과거로의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바로 이 마을이 내세우는 문화상품이자 타 도시와의 경쟁력인 듯하다.
19세기로의 여행, 고흐의 흔적과 더불어 바로 이 마을이 갖는 매력 중의 하나이다. 고흐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오베르 성'의 오베르 미술관은 17세기 건축물로서 인상주의 화가들 시대로의 여행이라는 주제의 상설 전시는 이곳을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이 시대를 보여주고 인상파화가들의 여정을 보여주는 좋은 전시회로 평가 받고 있다. 시청각자료와 테크닉 기법, 그리고 특수 음향효과를 이용해서 19세기 파리와 이곳 오베르의 생활상을 화가의 시선을 통해서 들어다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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