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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위대한 범인 - 맥 선생님

김환수

문화에세이(5)

88세를 일기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근교의 한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타계한지 7년이 되어가는 맥 선생을 청와대 근처 창성동에 있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해방 전후 비평과 책” 전시회 작품 중에 동아일보에 1955년 2월 3일자로 그가 기고한 이중섭작품전 평과 함께 40대 초반의 그의 사진이 담긴 패넬이 전시되어 있었다.



흔히 “맥 선생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아더 J. 맥타가트 (Arthur J. McTaggart)박사는 35년 이상을 이태리, 폴란드, 한국, 베트남 등에서 근무한 미국의 외교관이다. 그는 1952년에서 1964년까지 12년간 아마도 그의 생애의 가장 정열적이고 생산적이었던 장년기를 주한미국대사관 재무관, 대구미국문화원장, 미국공보원 부문정관을 역임하면서 한국에서 보냈고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에는 대구시로부터 명예시민으로 추대 받고 경북대학교로부터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어딘가 특출한 분이셨다. 철저하게 검소한 삶을 살면서 남에게 많이 베푸셨지만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않으셨고 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생전 자기 차를 가져보지 않았던 분이다. 나는 가끔 그에게서 동양적인 선비 같은 면모를 보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 동안 고향의 한 기계회사의 기계공으로 일 하다가 퍼듀 (Purdue)대학과 코넬 (Cornell)대학을 거쳐 명문인 스탠포드 (Stanford)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뛰어난 학력과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세속적인 입신이나 양명에 뜻을 두지 않았었다. 그는 과거에의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야망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충실했고 성실한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독서하고, 독서를 통해 삶을 윤택하게 하고 윤택한 삶의 지혜를 이웃과 나누는 선비풍의 지성인이었다. 한국을 좋아했고, 문화를 사랑했고, 사람들과의 사귐을 귀하게 여겼던 선생은 12년의 한국 근무기간 중 바쁜 공무의 틈틈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문리과대학, 사범대학)를 위시하여 경북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맡아했으며 강사료에 자기 돈을 보태어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곤 하였다. 1975년 공직에서 은퇴한 후 대구로 돌아와 1997년 이 땅을 떠날 때 까지 영남대학교의 초빙교수로 봉사하면서 20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은 사회 각계에서 활동하는 수혜자들이 우정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에 문화재 400여점 기증
하느님은 공평하시어 한 사람에게 많은 재능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하지만 선생은 진정 르네쌍스인이셨다. 박학다식하고 이성적이면서도 예리한 감성을 지녔던 선생은 50년대와 60년대에 “사상계‘와 여러 신문들에 인문과 문학의 세계적인 흐름을 소개하는 글들을 기고하기도 하고 또 미술전시회와 음악회 등의 평도 활발히 쓰시면서 전후 불모지대였던 이 나라 지성사에 신선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 전시에 포함된 이중섭작품전의 평도 그중의 하나였고 또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 세 점을 구입하여 뉴욕에 있는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 기증하여 뉴욕 현대미술관이 소장하는 최초의 한국작품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었던 그에게도 청자나, 이조백자 특히 소박한 토기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서 한국에 있는 동안 그는 많은 골동 그릇들을 수집하였고, 그 유물들을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박물관 (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에 위탁 보관 하였었다. 그가 타계하기 3년 전인 2000년 3월에 그는 신라, 가야, 통일신라시대 토기들이 주종을 이루는 고려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 그가 소유했던 478점의 문화재들을 찾아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고 국립박물관은 대구국립박물관에 보내어 전시한 후 그곳에 소장토록 하였다. 그는 베트남에서도 월남정부 패망 때까지 10여년을 근무하였고 종전 후에는 그가 데리고 있던 월남직원들을 자기 집에 살게 하면서 미국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으며 훗날 자기 집마저도 헐값으로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한국과 베트남전쟁중의 외교관 생활을 위시해서 88년 생애의 3분의 2가 넘는 57년을 해외에 살며 그 나라들의 고난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그의 인류에의 봉사는 선생을 알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선생은 이렇듯 특출한 분이셨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런 비범한 일들을 한낱 촌로 (村老)의 극히 보통일처럼 해 내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선생에게는 인생과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조 (觀照)하는 뛰어난 능력과 세속적인 혈연 (血緣)이나 인간관계를 극소화한 철인 (哲人)같은 행동력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히 위대한 범인 (凡人)이요 범속 (凡俗)의 철인 (哲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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