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베니스 비엔날레와 이탈리아, 스위스 기행 (3)

김환수

밀라노

베네치아를 떠나 버스로 세시간반쯤 걸려서 밀라노에 도착 하였다. 베네치아와 함께 밀라노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이탈리아 제일의 공업도시이고 세계 패션의 중심지이며 그리고 오페라극장 라 스칼라 (La Scala)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로마 보다 깨끗하고 건물들도 로마 보다는 높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현대적인 도시는 아닌 것 같다. 도착 하자마자 점심을 먹고는 국립과학기술박물관 (Museo Nazionale della Scienza e  Technologia Leonardo da Vinci)에 같다. 대부분 설명이 이탈리아말로 되어 있어서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국립 과학관 같은 곳으로 레오날도 다 빈치 실이 따로 있어서 그의 여러 가지 발명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의 흥미를 끈 것은 1495-6년에 제작했다는 자동직조기였다. 이 직조기 이후 19세기에 영국에서 다시 만들어지기까지 직조기가 만들어진 것이 없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곳을 나와 시내 중심가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에 있는 두오모 성당에 갔다 1386년에 시작하여 무려 500년이나 걸려서 완성된 세계최대의 고딕 건물이라는 설명 이다. 135개의 첨탑과 2245점의 조각상으로 장식된 흰 대리석의 거대한 성당인데 가장 높은 첨탑 (약 108m)에는 도시를 지키는 마리아상이 서 있다고 한다. 승강기를 타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첨탑들의 숲 사아로 내려다보이는 밀라노 시내도 장관이었지만 첨탑들의 고딕식 조각들의 정교함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성당 속에는 웅장한 돌기둥들과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우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두오모 광장 근처의 상가에는 알마니, 샤넬, 프라다를 위시하여 귀에 익은 많은 고급 부틱 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거리들은 기대했던 것 같은 화려함이나 눈에 띄는 활력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청담동이나 갤러리아등 명품점 들이나 일류 백화점들은 너무 뿌리 없는 허식에 들떠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폴체스코 성 (Castello Sporzesco)은 시간이 없어서 많은 광광객들이 하는 것처럼 그 앞에서 사진을 몇장 찍고 밀라노를 떠나기에 앞서 브레라 미술관 (Pinacoteca di Brera)에 들렸다. 대리석의 육중한 건물에 소장품들도 잘 보존되고 전시도 잘 되어있었는데 이곳은 롬발디아파와 베네치아파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회화의 걸작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원래 예수회의 교육시설로 만들어 졌으나 현재는 미술학교로 일부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유명한 라 스카라좌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속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으나 세계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다시 지은 것으로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도 퍽 초라해 보였는데 공연관계 일에도 오래 관여했던 나에게는 큰 실망이었다. 어쩌면 겉으로 번지르르한 현대적 공연장에 내용이 빈약한 우리의 경우와 잘 대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루체른
8월 26일이다.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에서의 7박 째를 보내고 오후 1시 20분쯤 마지막 기착지인 스위스의 루체른 (Lucerne)으로 향했다. 지난 수일간 스위스에 내린 폭우로 100년만이라는 큰 홍수가 나 곳곳에 산사태도 나고 해서 터널들이 막히는 바람에 루체른에서 묵을 예정을 바꿔 취리히에서 묵게 되었다. 밀라노에서 루체른까지는 약 4시간 반쯤 걸린다고 하는데 우회해서 오는 바람에 8시간이나 걸려서 밤 9시 40분쯤에야 취리히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회해서 오는 길은 지루하기는 했지만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알프스의 풍경과 호수들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이곳은 국경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는 겻 같았다. 톨게이트 비슷한 것이 있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산 사람들이 세금을 환급 받기 위해 받는 수속 이외에는 여권이나 사증 등을 체크하는 절차조차도 없었다. 국경을 넘으면서부터 분위기도 싹 바뀌었다. 이탈리아의 오렌지 톤이 회색과 흰색으로 바뀌고 산위까지 지어놓은 집들과 그 주변들도 마치 골프장의 잔디를 깎아놓은 듯 잘 다듬어져있어 신선한 느낌을 준다.

취리히 교외의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루체른으로 향했다. 아직도 소통이 되지 않은 도로를 돌아서 곳곳에 물이 잠겨있는 고풍어린 루체른 거리를 지나 로이스강을 가로지르는 그 유명한 목조다리 카펠교 (Kapellbrucke) 까지 갔는데 거의 다리 까지 찰랑찰랑 찬 물 때문에 다리를 건너지는 못했다. 루체른 시내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는 아직 물이 다 빠지지 않아 군데군데 임시로 나무로 만든 징검다리 통로를 건너 거리를 빠져나와 리프트를 타고높이 2132m의 필라투스 (Mt. Pilatus)산에 올랐다. 알프스의 연봉들이 (73개의 봉오리가 있다고 했다) 만년설을 이고 둘러싸였고 산 아래로는 루체른호가 내려다보이는 장관이 펼쳐져있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48%) 톱니바퀴 등산열차를 타고 약 4.6km의 거리를 내려오면서 그 높은 산에 여기저기 방목되고 있는 소들을 보았는데 전국토의 70%가 산악이라고는 하지만 그 산들을 골고루 이용하는 재주가 놀라웠다.

공항으로 나오기 전에 우리는 루체른 시내 중심가 근처에 위치한 빈사의 사자상을 보러갔다. 커다란 바위벽에 창에 맞아 쓰러진 빈사상태의 사자가 아주 리얼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 사자상이 있는 곳 입구에 있는 돌 표지판에는 라틴어로 HELVIORUM FIDI AL VIRTUTI 라고 삭여져있었고 그 밑에 영어로 “TO THE LOYALITY AND BRAVERY OF THE SWISS' 라고 써 있었는데 ”스위스 병사들의 충성심과 용맹을 기리며“쯤으로 변역될수 있으리라. 오늘날 스위스 사람들은 국민소득 43,000여불로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부존자원이라고는 거의 물밖에 없는 척박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었던 동력 중의 하나가 tm위스 용병이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빈사의 사자상은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에게 고용 되어 싸웠던 스위스 용병들이 용맹스럽게 싸우다 전멸한 슬픈 사건을 기리기 위에 세워진 것인데 동시에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서 용병으로 가서 돈을 벌어야 했던 스위스인들의 처지를 빈사의 사자에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는 설명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당시 전 세계에 나가있던 스위스 용병의 수가 40,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8박 9일의 이탈리아 와 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취리히 공항으로 가는 길에 이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다시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10여년이나 국민소득 일만불의 언저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한때 눈부신 경제발전의 신화를 이룩한 발판이 되었던 60-70년대 서독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의 피눈물 나는 고생과 그리고 월남 파병 (용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의 뼈아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