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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진리의 바다에서 항해하기

박응주

홍순환 개인展

- Internatioales ausstellungs-und austauschprojekt kuntdoc, Korea -

장소 : Laden 44
날짜 : 2007. 7.27(금)-8.12(일)
오프닝 : 2007. 7.27(금) 19:00
홈페이지 : www.kunstdoc.com
연락처 : 0173 100 3733
주소 : Laden44 Hermannstr.44 D-40233 Duesseldorf
후원 : Art council Korea/Kulturamt Duesseldorf



'전체는 비진리다'고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단언했다. 따라서 우린 예컨대 풍성히 과실이 열려있는 한 그루 나무의 만개(滿開)를 칭찬할 수도, 그렇다고 그 만개 밑에 드리워진 공포의 그늘로 인해 죽어가는 음지의 식물을 위로 할 수만도 없다고 말한다. 과실의 만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고 ‘칭찬’하는 순간 그것은 즉시 아름답지 못한 음지식물이라는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 될 것이요, 음지의 식물을 ‘위로’하는 경우란 즉, 그 허약함을 긍휼히 여기는 순간 곧 ‘그가 허약하다’는 것, 그걸 ‘나는 안다’는 것, 따라서 지배의 전제조건을 확인할 뿐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현실로부터 완전히 지양된 무엇, 즉 타자이며 비존재자로서, 억지 종합이나 화해를 부정하는 ‘매개(媒介)’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예술론이 피력되는 곳이 이곳이다.

‘중력’을 이야기하며 슬픔이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홍순환의 어법은 아도르노가 ‘슬픈 학문’이라 명명한 바의 철학의 궁지, 곧 예술의 불가피한 책무로 돌리고 있는 바의 것에 호응하는 바가 있다. (그의 이전의 작업들은 ‘구조의 위태로운 현상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상의 기물들의 정체성을 변환시키거나 부분적 가치들을 훼손함으로써 중력의 물리학적 기준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심리학적 기준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는 다양한 실험들은 영혼과 사물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내면화된 세계로서의 분위기(stimmung)의 세계가 사라지는 현상학적 사태에 대한 리포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존재 망각을 불러오는 ‘시각적 중력’을 고발함으로써, 또는 정신을 의탁했던 물질에 대한 턱 없는 신뢰가 느끼는 배신감으로써, 시각적으로 완결된 구조지만 실로 바늘 끝의 역학에 전 존재를 의탁하고 있는 불안감으로써, “덕(德)의 유일한 혹은 제1의 기초는 자기유지의 노력(스피노자)”이라는 모든 서구 문명의 진정한 격언의 실체란 권력의 판옵티콘적 광기, 혹은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상의 시간성에 의한 관성에 의해 강압적으로 속박해 오는 것임을 통찰하는 것으로써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03년의 한 전시는 ‘사랑의 고백(declaration of love)’이라는 타이틀의 영상 작업을 통해 인간과 동물 사이의 단절 상황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 상황으로 유비하며 애잔하게 그려나간 적이 있기도 했다.
예컨대 홍순환의 개념 미술을 이해할 밑돌로 삼아 볼 것을 요약해 본다면, 그의 ‘중력’이란, 중력 밑에 눌린 실체(그림이라면 그림의 배후인), 인간을 포함함 사물들의 이미지로부터의 사라짐, 즉 왜곡되기 이전의 즉자적인 사물의 상태에서 발하는 은은한 태고의 향기의 사라짐을 애석해하는 그리움 혹은 사랑의 연정을 깔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예술에서 이 진보의 강박은 몇가지 성찰해 보아야할 지점이 있다. 우선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밝히고 있는 바처럼, 모든 운동 전체는 사회적인 과정으로서 나타난다는 점, 즉 모든 사회적인 현상의 진정한 배후에는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그 출발점으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사유의 단초를 우리의 삶에 위협적으로 접근해 오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소위 자연 속으로, 싱겁기 짝이 없는 농촌의 목가 상태 속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것은 ‘여성적인 체념’의 또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것.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인간 때문에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자연에다, 혹은 자연을 모델로 자연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퇴화상태같은 것에다 전가할 수는 없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진보나 반동의 차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의 존재조건의 현상태(status quo)라는 말일테다. 예술이 여기서, 이 ‘자유롭지 못한 사회적 개인의 현상태’로부터 출발하는 괴로움, 연민, 난처함, 궁벽함, 쩔쩔맴의 기록인(/이곤하는) 이유이다.

형식적 변증법에 휘둘리는 선동적 소환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되기 위한 퇴폐적이고 극단적이며 래디칼한 자기 성찰의 몸부림이 훨씬 더 필요한 목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번 작품이 ‘진보’에 대한 어떤 강박으로 인해 ‘홀로 선 자’의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손을 슬며시 내미는 지점이 있다면, 이 또한 ‘순진’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본다.
곧장 그것이 등장하자마자 생태학적 연민을 자아내는 초원의 울음(영상)이 문제였을까? (‘초원’이 제거된 화면 가득히 불타오르는 ‘그냥 불’의 무국적적 영상이었으면 어땠을까...?),
열주와 그 초석으로 받쳐진 대중문화 코드들의 환유가 문제였을까?
그가 외로움을 버티어낼 여력이 소진되어 가는 것인가?
그러나 이 모든 세부의 술어적 판단의 정밀성을 따지는 나의 팍팍한 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내재적인 정합성은 미덕이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순진’하다는 것. 최소한 예술을 비진리의 바다에서 무동력선에 실어 항해할 것을 결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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