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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장소'를 열어라

이영철


결국 비평은 '그러지 마', '이렇게 해라'를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명령법과 변형의 금지. 그것은 확보 부동하고 엄숙한 <주인>에게 기대는 체제다. 모더니즘이건, 리얼리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포스트-포스트 무엇이건 비평은 명령어를 강요(당)해 왔다. 미술 담론을 선별, 삭제, 통합, 관리, 중심화하면서 입장과 입장이 맞대결하던 1980년대 그리고 뜨겁던 열기가 완전히 사그라진 지금에도 비평은 명령어 안에서 명령어를 끌어낸다. 비평은 입장(대답을 강요하는 문제의 근거), 이념(이 단어에 대해 언제나 좌파/우파 대립을 떠올리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그것이 새겨진 특정 작가, 특정 작품을 위해, 담론의 장소를 소거하며 성립한다.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담론의 장소를 소거함으로써 성립한 것이다. 예수의 담론은 동시대의 담론에 대해 어떤 차이성으로만 존재했다. 그의 담론을 그것 자체의 적극적인 의미로 끄집어낼 때에는 그러한 어긋남은 없어지고, 예수가 참이고 다른 사상가는 거짓으로 된다. 이런 사정은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것이란 담론의 장소를 입장으로 바꾼 것이고, 텍스처(texture)로 존재하는 것들을 뭔가 이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본 것이다. 담론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입장을 세우는 것은 반대급부이다. 한국 미술에서 물음은 없으며, 대답에 대해서만 대답할 뿐이다. 아무리 온건하고 상징적이고 통과의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어버린 명령어라 해도 그것은 작은 사형선고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명령어를 어떻게 피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령어가 감싸는 사형선고를 어떻게 피할 것이냐?'가 정작 문제다. 너는 명령어를 받을 때 이미 죽었다. 들뢰즈의 명문(名文). '하나의 사물, 하나의 말이라도 분명 이중의 본성이 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뽑아내라, 명령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켜라.' 비평이 담론을 활성하기 위해서는 비평적 입장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들로 분해해야 마땅하다. 이 말에 금방 항의가 올라온다. '그것은 해체가 아닌가? 그것 또한 죽음이 아닌가? 차라리 명령어를 받겠어....' 하지만 해체를 변형의 금지로부터 영리하게 벗어나는 것과 구분하자. 비평을 하려는 당신은 변형의 금지에 대한 제도적 장치들과 정신적, 비평적, 심지어 신체적 전투를 벌여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 비평이 비평 공간을 열기 위해 요구하는 것은 명령어와 해체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김지하의 표현을 빌자면, 문화의 죽임과 살림의 싸움이다. 좀더 구체화된 표현으로 펠릭스 가타리가 말하는 3가지 생태즉, 정신생태, 환경생태, 사회생태를 위한 전투이다. 명령어와 명령어의 출구없는 언어 구조를 바꾸지 않으려는 직업적 전문가주의자들(이데올로그들)을 그들 자신의 바깥 이나 하위단계로 이끌어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비평은 어떤 비평인가? 선물 행위의 의미를 공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선물하는 행위를 잊어버렸다.'(아도르노) 기껏해야 자신이 원했던 것을 사용자user에게 파는 것일 뿐이다. 대중을 위해, 대중과 함께 한다는 입에 발린 박애심은 사회의 눈에 띄는 상처 자리를 계획적으로 봉하려는 행정적 자선 행위를 닮아간다. 선물 행위의 참된 행복은 선물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상상에 있다. 그러나 우리 미술계는 선물 받을 자격을 먼저 심사하는 선물 행위의 몰락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10년전만 해도 '한국미술평론가 협회의 회원이거나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고서는 평론가의 자격이 인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다. 생각은 아직 일제 시대의 잔재에 머물고, 행동은 정치적 리얼리즘 미술에 대한 불인정 때문에 비평 공간을 한쪽으로 닫아버린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현대미술 큐레이터 협회를 위해 미술관에 종사하는 큐레이터가 아니면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합의를 강제로 끌어내기도 했다. 현대미술의 전면적인 변화와 미술관 큐레이터의 관계는 노골적으로 어긋나거나 대립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에는 미술관 밖에서 활성화되는 새로운 미술에 자신들의 영역 표지판을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지식의 쇄국 상태로는 비평이건 큐레이티이건 점점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작년 가을 뉴욕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비평가 벤자민 부클로는 '공공 기관으로서의 전통적인 미술관의 기능은 한계에 도달하였다. 왜냐면 공공 영역이란 더이상 없으며, 미술관은 더이상 공공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문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공간,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의 전통적 기능은 악화되고 사라지기 조차 한다'고 발언했다.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동시대의 현상이며, 미술관의 의미와 기능 자체가 전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여기서 시간을 거슬러 1960년대에 이웃 국가의 젊은이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던 한 비평가의 발언을 살펴보자.
끊임없이 우위에 선 문화에 의해 해변이 씻겨져온 변경의 나라라는 역사적인 숙명을 짊어져 온 것을 생각하면 온몸으로 통증을 느낄 정도이다. 우리에게 문화적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는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휘몰아치는 태풍에 본디의 형체를 잃는 것이었다. 그리고 겨우 뒷수습을 하고 판자집이라도 지을라치면 아직 토대도 탄탄해지지 않은 틈에 다음 태풍에 얻어맞아 날아가 버렸다. 물론 그때마다 비약적인 높이로 문화는 끌어올려진다. 그렇더라도 여우에 홀린 듯 그 높이를 별로 실감하지도 못한 채 이전의 과정을 답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요시모토 다카아키)


아주 적절하게 이 말은 21세기에 진입한 우리의 상황으로 건너온다. 60년대의 앵포르멜, 70년대의 다원주의, 80년대의 민중미술, 그리고 90년대의 전지구화는 모두가 태풍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태풍에 얻어맞을 때마다 우리의 현대 미술은 비약적인 높이로 끌어올려졌다. 문제는 비평이 그 높이를 실감하기에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속수무책이다. 바닥에 너무 오래 엎드려 있었다. 한국미술의 유니폼주의 문화순결주의는 위험하다. 정신의 쇄국은 지역주의, 민족주의에 승리를 안겨주지 않으며 대신 문화의 파시즘화를 초래할 수 있다. 문화에 모국어는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문화가 있을 뿐이다. 프루스트는 '걸작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진다'고 했다. 외국인이 되라. 말더듬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혈통을 더럽히지 않고 혼혈아가 되고자 한다면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라. 새로운 비평을 위한 혜안이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한국어 속의 인도인, 아프리카인, 유럽인, 남미인이 되라.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민족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 광화문에서 모두가 외친 구호 대~한민국은 암호, 하나의 통과의례적인 패스워드(password) 라서 마음에 든다. 90년대 이후를 비평의 공백기라 하지만, 실제로 글쓰기는 적지 않다. 필요한 것은 입장의 부활이 아니라 80년대부터 묻혀온 담론의 장소를 다시 발견하고 구축하는 수행력perform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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