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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부산비엔날레?

이영철

나는 한국의 영화 감독들 가운데 특히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을 좋아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예술적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김기덕 감독의 근작 영화들에서 과감한 상상적 비전과 실험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심이 생긴다. ‘빈집’은 독창성이 강한 작품이다. 상업주의와 뗄 수 없는 분야 임에도 불구하고 반상업주의 예술 영화를 만들려고 도전해온 그의 예술가적 태도는 값진 것이다.

그에 비해 미술 비엔날레를 만드는 예술 감독들은 자신의 내면 세계, 상상력, 예술적 실험성을 보여주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섣부르게 대중을 팔고, 온갖 제도적 조건을 핑계삼아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감추거나 미리부터 타협해버리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엔날레 전시에서 기획자의 독자적인 실험, 감각적 취향, 가치 지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잘 되어 봐야 깔끔하게 정리 잘 되었고 주제 분명하고 볼만한 작품이 많다는 식이 고작이다. 거기에 잊지 않고 한가지 더 붙는 단서 조항은 우리식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상투어다. 거기에 모든 이론이 꿰맞춰지고, 한마디씩 비판의 말을 보태기 좋아한다. 전시를 오픈하기 전에 모든 것은 운명 처럼 정해져 있으므로 새로운 발견도 재미도 감동을 기대할 수가 없다. 게다가 문화적 쟁의나 담론을 지나치게 의식할 경우(그 또한 그저 한번 해보는 소리에 불과)에는 전시의 시각적 시나리오가 아니라 모두가 주제에 관심을 집중한다. 물한방울, 먼지가 어떻고 틈이 어떻고 하며, 전시의 감각 보다는 의미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그것을 미디어 홍보의 재료로 삼는다.




부산비엔날레는 아예 주제를 지휘부가 정해서 하달하는 식이어 왔다. 마치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보인다. 내가 예술감독을 했던 2회(2000년) 당시에 파(wave)라는 주제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일을 맡고 나서 훨씬 나중에 알았고, 나와 로자 마르티네즈와 후한루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주제를 ‘고도를 떠나며(Leaving the Island)’라 정했고, 그 이듬해에 로자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ARCO 행사 전시에서 ‘군도(archipelago)’라는 주제를 정하면서 부산비엔날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감사했다. 감사와 배려의 마음, 기본을 존중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가장 부족하다. 말도 안되는 예산, 아마추어 조직에 주제마저 미리 정해서 하달한다.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언제든 ‘기본’이다. 사이비 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차별화를 말하기 전에 기본부터 세워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기본이다. 정체성이 아니라 기본이다. 기본을 세우는 예술은 항상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김기덕의 영화는 예정 상영일도 채우지 못한 채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간판을 내린다. 김기덕의 영화가 잘못된 것인가? 오히려 그의 작품은 태극기 휘날리며, 올드 보이 따위의 후진 영화들 보다 충분히 차별적이고 경쟁력이 있고 우리식 정체성을 갖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외면당한다.

반헐리웃, 반상업주의 정신을 기본으로 해서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비엔날레는 대중들의 불평에 겁부터 집어먹지만 사실은 능력이 안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기본’에서 출발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차별화도 경쟁력도 정체성도 이뤄낼 수 없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대중들 앞에서 주제의 타당성이나 배우들의 연기의 특징에 대해 해설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엔날레의 감독들은 의당 그런 것을 하는 사람 처럼 되어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그것이 거의 전부일 정도로 ‘상투적인 말들’로 미리 조율되는 비엔날레다. 아무 말이나 하는 벽들의 사회구성체, 그것이 우리 미술계이고 관객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관객의 심리적 시간을 측정하고 리듬으로 감동을 끌어내는 일을 고민하는 비엔날레가 되어야 한다. 주제의 입장을 관철하려 들고(그렇게 종용당하고), 작가, 작품만 잘 정하면 70퍼센트는 해결된 것으로 여긴다. 이제 남은 것은 공간 안에 작품들을 잘 보일 수 있게 설치하는 일이고, 나머지 과제는 대중 홍보가 된다. 대중 홍보가 비엔날레 내용(의 형식)으로 된 최악의 사태가 한국에서 일어났다.




5회 광주비엔날레의 ‘참여관객제’이다. 터보 엔진-이벤트성-한국 자본주의의 속성에 완벽하게 야합한 이번 광주 비엔날레에 대해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은 찬사일변도였다. 섬의 원주민들 처럼 미술가들이 드디어 한국형 비엔날레를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정체성을 이뤄냈다고 떠들어댄다. 똑 같은 약을 먹었거나 지역성 괴질에 걸린 반응이다. 부산은 이런 양상에서 얼마나 거리가 있는 것일까. 소위 국제라는 단어를 붙힐만한 부산비엔날레의 정상적인 출발은 2회에서 시작되었다. 첫회는 가나 화랑에서 작품을 빌어다 벽에 걸었으니 그것은 비엔날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2회 당시에 로자 마르티네즈와 후한루는 비엔날레라는 명칭을 쓰자고 했지만 이미 홍보는 국제아트페스티발로 나간 상태였다. 외국 대사관, 영사관, 외국 재단들로부터 지원 받은 국내 첫 사례였고, 공동큐레이터제, 최저 예산 비엔날레 등의 기록을 만들어 냈지만, 사무국은 도록을 제작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구두 통보를 했고 큐레이터들과 작가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3회 부산비엔날레는 2회가 성취해낸 최소 예산(6억)에서 시작했으나 그것이 가능해진 열정과 희생, 노하우, 컨넥션을 외면했고, 예술감독과 큐레이터가 똑같이 험한 길을 가도록 했다. 문제는 누가 누구를 당하게 하는 것인가? 인간인가? 인간이 빠진 구조인가? 광주건 부산이건 서울이건 한국의 미술인이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외국의 아무리 좋은 작가, 작품을 갖고 와도 그것을 배우고 음미할 마음이 없고, 사람 간에 인간적 유대와 터취가 없고, 서로간에 행복감과 기쁨을 나누는 배려심이 없는 한, 그것은 정신이 병든 것이다.

4회 부산비엔날레는 예산 수준이 훨씬 나아졌고, 5회 광주비엔날레의 궤도 이탈로 인해 상대적 우위에 있었다. 2인 예술 감독 사이에 어떤 시너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절충식 모자이크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포맷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여전히 아마추어적이며, 미술 행사가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우리는 행복한가? 큐레이터들, 작가들, 스태프들은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틈 네트웍은 전시의 공간, 조명, 동선, 시선들의 교차,관객들의 발걸음,세미나의 분위기,오프닝 파티, 비엔날레 말들의 문화, 그것들을 생각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모든 비엔날레 전시들은 아직 진정으로 말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늘 간결한 리뷰에 그쳤고, 문제점들은 쉽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버렸다. 전시는 허공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 그 잠시를 만들어내는 큐레이터와 작가들, 그리고 그 잠시를 포착해서 말을 건넬 줄 아는이론가들, 그리고 그것에 흥미를 느끼며 생각하는 관객들이 없는 한, 그 자리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행을 생산하는 노동 속에서 우왕좌앙한다. 남는 것은 관료주의 전시 행정의 딱딱함과 어설픈 수치와 지표들이다. 정신은 빠져 나가 있고,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엔날레를 보면서 언제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다함께 진심으로 마음을 모아 기본을 행하는 연습부터 하자. 거기서부터 좋은 정신적 자세와 리듬과 선이 나올테니까.

- 출처:부산비엔날레 소식지 20호(20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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