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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⑮

이영철

결 론

모든 일이 그렇듯이 가능함은 불가능함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한 다음에 논의될 수 있다. 새로운 영역은 멀다. 만일 그것을 원한다 해도 지금 당장 그리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시아가 궁극적 목표에 대한 견해를 잃는다면 이 과정에 있어 그 역할을 다하는데 실패할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며, 자국의 관심에 대해서만 관계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 동시대 미술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할 몇가지 점을 정리하면서 끝을 맺기로 하자.

(1) 예술적 표준의 문제 : ‘순수미술’의 개념은 본래는 분리되었던 ‘미술’과 ‘미’가 합쳐져서 생긴 것이라는 점과 ‘미술관’과 ‘미술전시’라는 시스템은 근대 유럽시대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시아 미술관(전시)’은 그들이 아무리 지우거나 덮어버리려고 해도 근대 유럽의 강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일 뿐이다. 서구적 지식과 관념의 강화는 국제적인 미술 시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그와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각각의 작가들이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비엔날레 혹은 트리엔날레 등 자신들의 국가를 대표하여 말하는 ‘아시아 미술’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현대미술은 국제적인 것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각 사상과 가치, 예술의 기준은 지역, 그룹, 언어, 종교, 문화, 교육 등에 따라 다르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시대의 현대미술은 전혀 국제적이지 못하다. 문화인류학자 스티븐 펠드(Steven Feld)는 “파푸아 뉴기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술을 전세계적인 예술로서 결코 보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조차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대 미술이 정말로 국제적인가에 대해 가장 명료하게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1989년 장 위베르 마땡에 의해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개최되었던 '지구의 마술사(Magicians of the Earth)'전이었다. 유럽 중심의 모더니즘에 내재한 보편주의 미학의 선입견과 제도적 관점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폭로되었고, 이 전시를 통해 각 지역의 미술은 비록 부분적으로 상호 영향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제각기 나름의 입장과 필요, 다른 문맥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드러내주었다.

그 점에서 이 전시는 모더니즘 국제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동시에 지역의 특이성을 고려하는 전지구적 미술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현대 미술은 사람, 지역, 역사, 사회, 문화적 제조건에 따라 차이가 분명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러한 차이와 문맥을 만들어내는 것은

(a) 현대미술은 산업적,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b) 그것은 현대 도시의 특성과 기능에 따라 작동한다.
(c) 그것은 폭넓은 교육과 매스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번성한다. 그러나 발전되고 산업화된 나라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맥락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d) 또한 발전되고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인데도 현대미술의 특성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국가, 지역, 사람들의 인지는 뉴스 미디어, 기술, 교육 등의 전파에 의해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단체가 만들어지며 국가, 지역들은 같은 맥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위에서 기술한 종류의 요소를 가진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이런 맥락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세계는 그것 자체로서는 이러 전세계적인 맥락보다 훨씬 작다. 유럽과 북미의 나라들은 현대미술이 생산되는 환경의 일부분이지만 심지어 그러한 나라에서조차도 대중들의 인기를 누리는 미술은 아카데믹한 미술들이다.


(2) 관객의 이해도 문제 : 미국이나 유럽에서 조차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은 1-2%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세계적인 현대 예술은 공통의 관심을 가져 서로 연결된 소수의 다른 나라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수 그룹인 것이다. 전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도 작은 세계이기 때문에 현대 예술을 인류의 정서적 ‘에스페란토’(공통의 언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이 커다란 세상에서 이렇게도 조그마한 현대 미술의 가능성은 대체 무엇인가? 특정 사람과 특정 지역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선사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의 차이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규정되지 않는 혼돈의 단계에서 존재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문화적 특징을 예술의 형태로서 규명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특징을 인지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가 독창성이 발견되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산수화에서 발견되는 자연의 관점이라는 것은 일본만의 독창적인 것이라 여긴다 해도 실은 일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일본 미술가들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그려진 산수화를 보면서 일본의 자연과 얼마나 유사한지 파악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세슈(Sesshu)나 토하큐(Tohaku) 같은 예술가 들은 일본 스타일의 산수화를 창출해 냈다. 그들의 그림 스타일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일본의 자연을 관찰하는 틀이 되었다. ‘풍경’이라는 개념은 자연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발견되고 발전해 왔다. 자연의 상태와 관찰은 같지 않다. 닐스 보어의 말대로 “사물은 관찰되어질 때 비로서 존재한다.”


(3) 민족과 지역의 특성 문제 : 현대 미술이 위에서 언급했던 맥락들(산업적으로 발전된 나라, 도시적 기능, 미디어 정보와 교육에 닿을 수 있는)에서 기능하기 시작한 이후, 지역과 민족의 틀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비록 현대 미술이라는 틀에 둘러 쌓여 있는 사람들이 소수일지라도, 이것은 너무나 다양한 개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또한, 현대 도시의 맥락에 있어서 기술과 정보의 단일화 과정을 통해 문화와 원래의 특성을 혼성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결국 이러한 상황 아래 각기 다른 민족과 지역의 독특한 성격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틀로 유사함이 차이점 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런 틀이 현대 미술이 작용하고자 하는 장소이자, 현대 작가들이 전 인류의 맥락 안에서 작용하는 작품을 만들어 전 인류에 맞는 세계적인 틀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현대 미술의 세계는 작지만 미래 세계에 있어 이런 세계적인 틀의 창조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4) 아시아 개념 정의의 문제 : 아시아 작가가 서구에서 전시를 하건, 아시아에서 작품을 발표하건 서구인들이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서구인이 만든 타자성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아시아의 범주를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많는데, 이는 지극히 모호한 감정에 봉착하게 만든다. 왜일까? 그것은 아시아의 범주에 세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a) 아시아에 대한 정확한 정의의 불가능함.
그리스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시작되고 15세기 이후 위대한 항해의 시대에 확장되어 공식화된 ‘아시아’의 개념은 오랫동안 유럽의 ‘발견’이라는 정체의 합성된 의식을 동반하지 않는 일종의 부정적인 개념으로 전해져 왔다. 이는 예를 들어 19세기 칼 막스의 ‘아시아 사람의 침체’ 또는 ‘동양의 전제정치’라는 말에서 명백하다. 강상중에 의하면 ‘동방’과 함께 지정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순서로써 ‘아시아’ 개념이 정착되는 기회는 청일 전쟁 이후의 일본 식민주의 제국의 침략과 대륙으로의 일본의 확장 정책 또 ‘남쪽으로 전진’이 처음으로 ‘아시아’ 에 모호하기 짝이 없는 공통 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은 ‘아시아’가 20세기에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의해 공식화된 지역의 수순일 뿐이다. 후기 식민주의의 현 상황이 교묘하게 이전의 ‘동양 미술’을 ‘아시아 미술’이라고 다시 고쳐 쓴다고 할지언정 대문자 기표로서의 ‘일본’이 계속해서 뒤에 붙어있는 검은 그림자로 느껴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한 지역의 특정한 특징을 조사하기 위해서 작용하고 있는 범주를 정의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특히 언어, 종족, 종교, 생태학적 지리에 있어 아시아 지역을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b) 순수한 아시아 문화를 유지하는 것의 불가능함.
아시아라고 알려진 지역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지역에서 독창적인 문화가 보존된 곳이 있을까?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식민화와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아시아권 국가들의 활발한 산업화 정책을 통해 서구 문화와 혼합되었다. 실재로 아주 극소수의 지역에서만 아시아만의 문화를 보존하고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특성을 나타내는 데에는 사실상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c)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한정 짓는 것의 불가능함.
관습적인 가치, 문화적 이상, 미의 기준에 대응하는 지속적인 도전은 현대 미술의 과업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미술이 특정 지역, 문화를 뛰어넘어 글로발이 될 때 그 존재 이유가 생기게 된다. 현대 미술의 목적은 특정 지역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지역과 세계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5) 화자(speaker)의 문제 :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는 제3 세계의 문제가 특히 신분이 낮은 (하위의 위치에 있도록 강요된 사람들, 탄압을 받는 이들) 여자가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다른 사람들이 신분이 낮은 여성을 대신해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서구의 후기 구조주의적인 담화에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질문하였다. ‘신분이 낮은 여성’을 ‘아시아 작가들’로 대체할 적에 자신들이 말하지는 못하고 재연해야 되는 ‘아시아 작가’의 위치에(정교하게 계층이 있는 현실) 아시아 작가들의 큐레이터로서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이중 가면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아시아 작가들을 선발하고, 순서에 맞게 배치하고 그것들을 묘사하고 (대신 말하고 재연하는) 의미화나는 존재로 표현된다. 레이 초(Rey Chow)는 이를 ‘재현 폭력’이라 부르고 특권을 가진 연구가들은 한 손에는 엘리트주의를 찾는 태도와 다른 쪽으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의 해방을’ 선언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두 번이나 불우해진다. 첫째로 그들은 식민지 시기에 경제적 기회를 빼앗기고 두 번째는 오늘날 그들 자신들만의 언어가 없어졌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그녀에 의해서 세워진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부정적 결론을 내렸다. ’아시아 미술‘에 관해서 말하는 것 대신에 ’아시아 미술‘이 말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술의 힘을 믿고 이러한 질문들을 계속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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