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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 존재의 폭력, 초이성의 공간

이영철

폴 오스터에 따르면, 1940년대 후반 사무엘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구도 감히 실패할 수 없는 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 이 말에 참으로 깊은 공감을 느낀다. 다른 누구도 감히 실패할 수 없는 그만의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것, 그로 인해 우리는 특정 예술가의 삶의 독자적 형태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우리는 실패한 예술가들, 사무엘 베케트, 아쉴 고르키, 바스 얀 아더, 에바 헤스, 엘리오 오이티시카, 첸젠, 박이소 등이 호흡했던 공기 입자들 중 일부를 들이마시고 있다. 호흡할 때마다 하늘의 입자 수백만 개가 몸 속으로 들어와 잠깐 데워진 다음, 다시 세상으로 흩어져 나간다. 생명과 물질이 만나는 어떤 곳에도 고요함은 없다. 항상 소용돌이치고 진동하며 불타오른다. 땅에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하늘은 두껍게 요동치는 영역이고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다.

산사를 찾아 헤매던 6년의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다시 창작에 미친 듯이 몰두하던 그 열정적인 시간들, 극도의 신경 쇠약과 환각에 시달리던 최근 2년은 자신의 머릿속에 갇혀 살았다. 자신의 뇌 속에 닫혀지는 경험은 오직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어떤 것. 그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그는 더욱 깊이 다른 사람들, 다른 것들과의 깊은 연결을 느끼게 욕망하였다. 숲과 하늘은 삶의 시각적 상수(常數)이고, 우리의 모든 모험과 사고, 감정의 복잡한 배경이다. 하지만 인간인 까닭에 인간이 그립다.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을 이파리를 주워 작가는 자신의 눈을 가린다.



베케트가 말하는 실패는 세속적인 성공의 반대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항상 해체해 가며 강인하게 지속하는 실천적 깨달음을 지칭하는 '삶-의-형태'(지오르지오 아감벤)를 가르킨다. 그것은 안으로 타들어 가는 탄화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강도 높은 내면적 튀틀림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속적 성공을 기대하다 무너지는 통속적인 패배주의나 염세주의와는 시작부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 안에서 삶 자체를 항상 의문시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자에게 헌정된 실패를 가르킨다. 15년 동안 그의 그림들을 지켜보면서 김성룡은 그러한 실패의 영역으로 걸어 나가는 용기있는 미술가로 보인다.




그가 볼펜으로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영혼은 곤경스런 삶의 계곡 속에서 본능적으로 실패의 냄새를 맡았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따라서 한번도 현실적 차원에서 긴급함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긴급함은 권력의 용어다. 권력은 긴급 상태 외에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정당화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늘상 긴급 상태에 호소하고, 암암리에 그러한 상태를 창출해 내려는 수단들을 만들어 유지된다. 그런 습성에 길들여진 작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실패자를 속으로 시기하고 경멸하는 버릇을 키우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은 전 세계적으로 도처에서 긴급 비상 상태에 처해 있고 작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주하게 달리거나 어쩌지 못한 채 멈춰 서 있다. 하지만 답은 없다. 어떤 답도 결코 우리를 온전히 담을 수 없으며, 답들은 어떤 권력의 형태를 예비한다. 긴급 사태에서는 답도 질문도 아닌 그 중간적인 협잡이 늘어간다. 반면 질문은 비권력의 상태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반이다.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어떤 것들. 예를 들어 바닥이 한없이 꺼져버린 어떤 상태, 어떤 무자비한 공허, 무력하게 마주해 있는 보르헤스의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김성룡은 '누군가 이치를 깨달을 때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허무와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일찌감치 세상의 바닥을 보았다. 황무지 같은 도시 거리에는 포식자가 넘쳐흐르고, 도시는 잔인함이 넘쳐흐르는 정글이다. 우리의 본능은 날카롭고 필요할 때면 서로를 사냥감으로 선언하고 덤벼든다.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서 도래하는 폭력성의 일부일 따름이다. 그는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다. '모든 폭력은 세상의 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은 현실의 장막을 찢으며 존재가 드러날 때의 날카로운 야수적 이빨, 존재의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도화선이다. 보자마자 우리 시선의 기계적인 접촉은 전기적인 에너지로 재빨리 변환된다. 보는 이의 근육은 긴장하고 신경은 더 많아진다. 그림을 좀더 반복하여 볼수록 다양한 선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춘다. 예리한 선들은 천천히 속력을 내다 때로는 돌풍처럼 몰아치기도 하고 때로는 불규칙적인 파선을 형성한다.

그의 작업에는 점은 없다. 점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원, 마침표가 되어버린 점,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신은 점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신이 부재한 세계는 자연의 마성이 개입해 들어온다. 과거에 겪었거나 현재 자신을 심부에서 휘젓는 어떤 것이 그의 그림 속에 숨쉬고 있다. 회화적 표현의 전통적인 수단에서 불구하고 우리의 내부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 외부의 힘들에 맞서, 그리고 예술의 인습적 역사 너머 초이성의 공간을 답사하려는 그의 고투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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