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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박이소 회고전 이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 글

이영철

심포지움이 너무 일찍 마련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전시를 통해서건 무엇으로건 그의 삶과 작업에 대해 좀더 충분히 회상하고 연구하는 시간이 없이 우리가 그에 대해 토론을 한다는 것은 너무 이르고 성급한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 말을 하고 싶어도 결국은 좌초하고 말 것이라는 점입니다. 얼마간 보여진 그와 드러나지 않은 그 사이에 우리는 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 틈이 생각보다 아주 깊고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이소에 대해 말을 하는 것과 그에 대해 전시를 만든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저질 방송국들이 저에 대해 시기하고 음해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박이소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작가를 보호하는 제도가 없고 그런 자질도 많이 부족합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벽들에 의해 서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숨을 쉬기 어렵고 산소도 부족합니다. 이런 탁한 환경 속에서 작가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갑니다.

박이소는 귀국후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 사실은 거의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웃음을 점차 잃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평을 한 적이 없고, 불평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유머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의 밝은 에너지와 빛을 주고 갔습니다. 마이너 인저리를 운영하던 시기에 그는 부르크린에서 '모두가 한배를 타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고, 94년에 배를 만들었습니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뜰 수 없는 배. 누군가는 두개의 다른 문화 사이에서 번역의 희박성이란 측면에서 그것을 해석했고, 누군가는 작가의 분신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작품에 박모는 정직성이란 노래를 불어넣었지요. 그것은 제작 과정에서 동시에 고려된 것이었습니다. 정체성이 아니라 정작 누구에게나 정직성이 더 문제인 것이지요. 이 작품은 어떤 냉소도 반어도 아니고 20년 작업 기간의 중간에 위치하여 가교역을 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배를 타고 있지만,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미술의 방향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둠 속을 항해합니다.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한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박이소는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각자가 지나가야할 다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미 1985년 뉴욕에서 대학원 졸업시에 어느 한 문장도 뺄 수 없이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창작에 대해 글을 남겼습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부분으로 전체인 양 말하는 관점의 한계에 대해 말하며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각자 깨달음을 구해 정진하는 것임을 말했고, 그는 그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나는 유작전에서 적어도 박이소의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고, 그런 작가를 우리가 갖게 되었고 한시대를 같이 했다는 것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박이소는 창작의 지식, 이념, 방법 보다는 삶에서의 깨달음의 중요성을 말하되 그 내용에 대해 전체인 양 말하지 않았고 더욱이 남에게 주입하려 든 적이 없습니다. <오각형의 자백>이란 그의 글을 보게 되면 그의 자세에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현대 미술의 메카라고 여겨지는 곳은 막무가내의 관념들이 상호 충돌하는 곳, 또 우리가 사는 현대는 그런 관념들의 힘들이 사방에서 우리에게 파고 들어 흔들어대는 그런 시대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온 한 젊은 작가가 온 힘으로 그에 맞서 최초로 선택한 행위는 부모님이 지은 이름을 스스로 지워 무명 인간이 되고, 굶기로 맞서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95년 귀국하였을 때는 무려 15일간이나 단식하는 기이한 면을 보였고 바로 그 무렵 작업노트는 온통 창작에 대한 무한한 에너지와 발상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는 자부심이 넘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그의 착상들에서는 비범함이 번뜩였습니다. 그가 처음 단식을 결행한 것은1984년,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였는데, 그는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밥솥을 만들다가 단식 마지막 날 정오의 시간에 문을 나서 추운 겨울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박모는 당시에 쓴 글에서 한번의 깨달음은 쉬우나 그것을 유지하고 갱신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라 했습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지식과 관념의 홍수들 속에서 나름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여겨지지만 2004년 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그가 낱개의 벽돌을 쌓듯이 살아간 날들, 그 낱게 하나 하나가 <삶과 죽음의 벽돌> 인 것을 되새기며, 그 자신 속에서 스스로 이뤄낸 것들이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와 얼마간 정신적인 교류를 했다고 하지만, 박이소가 내면에서 키워온 내공의 힘을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에 대한 전시를 만들기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제약 보다는 그가 스스로에게 <질문의 형식>의 살다간 그 삶의 진정성과 예술의 궤적을 어떻게 공감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어떤 합의가 아니라 공감일테고, 80년대 초 마이너 인저리를 하던 젊은 날의 그를 가장 먼저 만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던 정헌이 교수와의 깊은 대화 속에서 나는 길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박모를 만난 것은 92년 경이고 그 무렵부터 귀국 후의 작업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는 터에 나의 관심은 20년 동안 그가 줄기차게 자신의 내면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기록에 충실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나 사생활이 아닌 모든 것들을 기록했고 특히나 창작에 대한 자신의 고민들을 낱낱히 기록하고 있는 무서우리만치 철저함을 보인 드문 작가입니다. 그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커다란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고 특히 그의 이면을 더듬어가는 전시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마이너 인저리 취재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인쇄물에 남아있는 단 한장의 작은 사진 이미지인데, 추운 날씨에 브루클린/맨하탄 브릿지를 건너는 그의 썰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다리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고, 근대성의 승리를 뜻하는 기념비였습니다. 헤겔과 친구였던 그 독일인 설계자는 세계정신을 나타내고 싶어했으나 공사 도중 사고로 죽었고, 그의 아들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잃어가며 그것을 이뤄냈고, 동원된 많은 중국인 이민자들의 무참한 희생으로 세워진 다리라고 박모에게 들었습니다. 그는 그저 다리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다리를 선택한 것입니다. 허공에 드리워진 육중한 다리를 거너지르는 그의 모습은 연약하면서도 단호하고 단독자 외골수라는 느낌으로 왔고, 바로 이 갤러리에 있는 <지옥의 문> 안에 묵상하고 있는 동요하지 않는 한 남자를 떠올렸습니다. 200여 명의 동요하는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의자에 앉은 듯 부동한 채 사색하는 한 남자의 모습. 그리고 역사주의적 사고를 파기했던 1969년도의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 전시의 착상이 있었지요. 68혁명의 정신과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던 모든 젊은 작가들을 스위스 베른 쿤스트할레에 초청했던 <태도가 형식으로 되는 때>라는 하랄드 제만의 전시는 그 부제가 너의 생각으로 살아라(Live in Your Head)라고 되어 있습니다. 박모는 68 시대의 혁명적 분위기와 낭만적 예술성을 좋아했던 작가였습니다. 그는 뉴욕 시절 행동주의 전사였지만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유머를 간직한 단식 광대이면서 현실에서는 단호하고 냉철한 전사였지요. 넓은 황야에 자신의 등을 드러내고 서있는 전사가 무엇을 바라보고 꿈을 꾸었는지 같이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시 그와 함께 동거동락을 했던 샘 빙클리도 지적했듯이 내가 순례 행위라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전사의 모습과 하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을 말할진대 그에게 그런 면모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신비화가 되는 것일까요.

더러운 세상에 뒤섞여 우리는 순례의 정신과 전사가 하나가 되는 태도를 상실해 버렸다고 봅니다. 단식을 행한 후에 박이소가 보여준 것은 헌신과 저항의 정신이었고 커뮤니티의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미술 제도와 연관 없이 혼자서 일을 했습니다. 함께 모여 공부하는 모임을 가진 적은 있으나 무리를 지어 진영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는 홀로 서는 자였고, 제도를 비판하되 제도 안에서 결코 군림하려 든 적이 없습니다. 문화의 제로 지대에서 엘리트주의와 문화권력으로 짜여진 메이저를 거부하는 대안 공간 마이너 인저리를 외국인 유학생이 만들어 운영했던 이야기는 역사를 만들어낼 힘이 없는 민족에게는 하나의 전설이 될 것입니다.

미술판에서 어떤 진영을 상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 흠집이나 약점에 관심이 있고 그 배경은 대개의 경우 혼자가 아니라 여럿으로 얽혀 있는 법입니다. 탈속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작품의 재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양상은 동전의 양면이라 봅니다.
유작전의 제목을 놓고 삼성 전시팀과 사전 검토가 여러 번 있었는데, 단테의 디바인 코미디를 인용한 착상은 재미있으나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탈속의 코미디로 정했지요. 박이소의 삶이 세속과 현장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벗어나는 지점으로 향하는 순례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붙히기로 한 것입니다. 전사적 면모를 가지고 있었을 때 조차 박모는 세속적 기준과 가치에 저항하고 벗어나는 일상을 보여주었던 점을 고려했습니다.

박이소에게 있어서 창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 행위가 아니고, 지식을 섭취 하면서도 지식을 넘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에 대한 질문 형식으로 예술을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그렇게 하는 당연한 것이 라고 보지 않습니다. 정직해지기 어렵습니다. 21권의 작업 노트는 한권도 빠짐없이 남아 있고, 아주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팔라야바다>의 기본 개념으로서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고. 3천 피트에서 천 피트 중간에서 캠코더를 떨어뜨리고, 한번 떨어뜨린 것을 반복 재생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편집 할 때 사이의 인터벌을 3초에서 5초를 두게 되는데, 인터벌은 깜깜한 어둠이고 소음이 들리는데, 이것을 지옥의 변방이라고 작가는 가리켰습니다. 태어나기 전 잠깐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작가는 윤회에 대해서 상당히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관념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20년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기 생애에 대한 확신이 있지 않았을까 해요. 그런 점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요, 특히 후기 작품들에서 보이는 거의 공허의 세계로 향하는 박이소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면면히 그 모습들에 대해서 그 작가가 삶에 대해 어떤 자세로 살면서 예술을 했는가가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우리에게 숙제로 쥐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시 맨 처음에는 <삶과 죽음의 벽돌>이라는 아주 작은 드로잉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을 한 장의 벽돌에 비유한 것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로서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그것을 고민하면서 사는 한 작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삶에 대한 태도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죠. 하지만 그 삶이라는 것은 항상 삶과 죽음이 면해있는 그 모서리 지점에서 항상 고민을 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문제는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죽음을 센치맨탈하고 무겁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이 가면서 어느 지점에서 끝나 죽는 것이 아니고, 분명 죽음과 삶은 분명 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했다는 점이 아주 다른 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박이소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예술의 뉘앙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지점에서 나타나는 뉘앙스라고 볼 수 있고요. 이번 전시의 제목을 <탈속의 코메디>라고 했는데, 그 탈속은 바로 그러한 내용, 코메디라는 것은 뉘앙스의 측면에서 접근한 내용입니다. 저는 이 박이소 작가의 삶과 예술은 한국 미술계에서 큰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빛이 너무 강해서 정오의 예술가라고 붙였습니다. 정오는 그림자가 제일 짧은 것이죠. 그림자가 없으면 쉴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내면의 촉광이 너무 밝아 쉴 수가 없었던 사람이었고, 밤을 새워가며 창작에 대해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았어요. 그래서 아마도 젊은 학생들과 후학들이 박이소를 작가의 좋은 모델로서 고민을 하며 작업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8년 10월 22일 (수) 오전 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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