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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⑫-2

이영철

대만의 현대미술



대만은 다른 많은 아시아 국가들처럼, 매우
복잡한 과거의 격동기를 거쳐 지금의 활력있는 모습을 이룩했다. 섬나라인 대만은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 섬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mosa)라고 명명한 이래, 네덜란드, 스페인의 지배를 거쳐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거해 일본의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어 51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네덜란드, 스페인의 영향, 중국의 관례, 일본의 식민지, 그리고 서양 근대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다양한 역사적 유산들과 전후 정치적 환경은 대만에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인 이슈들을 만들어냈다. 1990년대 대만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 자신을 역사적이며 지리적인 위치에 확립시키는 과정에 있었다. 외교 단절로 인한 초기 여파를 겪은 후, 대만은 1980년대 국제 사회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는 아시아의 성공적인 경제 성장 이후 이 지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미술 분야에서는
대만 작가들의 작품들을 국제 미술계에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3년 Taipei Fine Arts Museum이 설립되면서부터 주목할 만한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들은 1990년대에 호주나 다른 유럽 국가 소속인 국외 미술 기관들이 주최하거나 협력한 전시회들을 통해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5년, 대만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참여 국가(contributing member)가 되었으며, 개인적으로 작가들이
광주 비엔날레, 아시아-태평양 트리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 그리고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같은 국제 전시들을 통한 새로운 기회들을 갖게 되었다.
1998년 욕망의 장소(Site of Desire)란 주제로 Taipei fine arts museum이 주최한 타이페이 비엔날레에서
Oscar Ho Hing Kay는 홍콩의 빈약한 정치적인 미술의 상황을 의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들은 미술을 통해 누군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혹은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갖고
정치미술을 제작한다”


홍콩 국민들은 대단히 현실적이묘 환상이란 것이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1985-95년 사이
대만 미술에 함축되어 있던 수많은 사회 정치적 문제점들은 대만 사회 내에서의 미술의 역할에 대한 강한 의식을 시사한다. 이것은 1980년대
중반에 시작하여 1987년 계엄령의 철회로 인해 정점에 달한 대만의 해방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종전의 억압되고 묵살된 예술가들, 특히, 대부분의
정치적인 작가들은 기존의 많은 금기들에서 많은 부분 해방된 것에 고무되고 있다. 대만 역사를 다시 쓰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은 문화계에 퍼져 있다. 개인적 표현에 대한 열정과 함께 작가들에 있어 두드러진 관심사는 공유된 공공 의식과 기존의 권위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1980년대 우 첸창(Wu Tien-chang)의 우상 파괴적인 작품들, 예를 들어 모택동과 장개석 같은 정치적 인물들의 초상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 정치적 금기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사적인 에로티시즘의 위선에 담겨진 고상한 예술 언어를 공식화하려 했던 호춘명(Hou Chun-ming)과 황친호(Huang Chin-ho)의 야하게 성적인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최초로 독립 문화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다.
양 마오 린(Yang Mao-lin)의 시리즈나 양 첸 웬(Yang Chen-yuen)의 현재 도시풍경과 관련한 도시 유물들의 지형학적 설계와 같은 작품들은 역사를 고찰하는 다른 방법론들을 제시해 주었다. 리 밍체(Lee Ming-tse)의 회화작품이나 수 웡 센(Su Wong-shen)의 애매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풍경화들을 통해 폭로된 현대 지식 계급의 은둔에서 조차 시적이지만 여전히 불변하는 목소리 - 사회에 팽배하던 무계획적인 산업화의 잔인한 횡령, 생태계의 악화, 그리고 다양한 시기에 서로 다른 문화들의 강요들에 대한 비판 - 는 뚜렷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분별이 가능한 정치적 의도나 좀 더 민감한 접근 방법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던 작가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관심사들을 표명하였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보편적인 사회적 규범에서 그들 자신을 분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자신들의 미술을 통해 상황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수많은 다원주의적이고 원기 충만한 미술 작품들은 주제와 형식에 대한 고민의 차원에서 창조되었으며, 각양각색의 해석을 갖는 공통 관심사들로 얽혀 있었다. 매우 불안정했던 사회는 1990년대로 진입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동요가 심해졌다. 1980년대 후반 출판에 대한 자유의 증가와 1990년대 전자 매체, 텔레비전의 출현은 사회를 더욱 자극시켰다. 현대미술의 현장에도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대만의 중부와 남부에 두개의 국립미술관, the Taiwan Art Museum과 the Kaohsiung Museum of Fine Arts을 설립하였으며, 또한 작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개인 대안 미술 공간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북부와 남부 Hsinbin Harbor에 위치한 New Paradise(원래 No 2 아파트였다), IT Park, SoCA, 그리고 Banboo Curtain Studio 등이 그 예이다. 예술 국가 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과 공공 미술 법령(Public Art Act)의 통과로 인하여 개인 작가들을 위한 공공 기금이 더욱 많아졌다. 이러한 기회의 증가로 말미암아 산업화된 대만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두드러진 활동이 가속화되었다. 이 신세대는 어느 정도 더욱 개인적인 관점에서 현대 사회 문화를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혹평은 가벼운 풍자나 다의적인 갈채까지도 모호한 감탄사로 대체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구촌 소비문화의 등장, 정보 기술로 인한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간의 상호작용(interplay), Y2K의 위협적인 위기, 생태학적 문제점들, 그리고 미학이나 형식주의에 대한 이슈들이 정치적 이슈들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주제는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미적 접근과 매체의 사용들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퍼포먼스, 설치, 사진, 컴퓨터, 인터넷과 같은 매체들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젊은 세대 작가들의 적극적인 지구촌 문화의 수용은 여전히 대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정의 내리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구세대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갈등은 다음 밀레니엄에서 계속해서 이어질, 고도로 다이나믹하고 다원주의적인 미술 현장에 반드시 기여 할 것이다.대만 국민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결코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다.
현 시기가 아마도 그들 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다양한 정체성의 공존이 서로 이해되고 재인식되는 시간일 것이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속박에서 비롯된 우리는(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이제 누구나 공공연하게 질문할 수 있으며, 가장 다원적이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답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대만인들은 그들의 다양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어떠한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제 1990년대 후반에 활동을 많이 해온 대만 작가들에 대해 살펴보자.
나는 가끔 공중에서 내가 마치 두개의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 . 육체가 경험하는 다른 형태의 정신적 경험 . . . 이제 그것은 가장 순수한 공기이며, 빛의 수많은 분자들, 각각 모두가 전체의 작은 중앙이며 한 눈에 포착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눈 높이 그 너머로 나는 두개의 아주 작은 형상들, 어린이와 나를 본다. 저 멀리의 한 점에서 나는 우리가 가까워져 오는 것을 본다. 우리 앞에 무수히 펼쳐진 모든 날의 한 지점으로부터, 나는 우리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본다 . . .
 
미래는 ‘정신의 꿈의 풍경(dreamscape)이다. 그것은 불확실하고, 우연적이고, 환영적이며 또한 역설적이다. 미래는 상상 단계에 있으면서도, 세대간에 걸친 경험의 더 넓은 연속체의 부분이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도 미래에서 다른 길을 찾고자 할 때 과거에 있었던 무언가와 어떤 연유로든 연관을 맺고 있다. 대만에 살면서 작업 활동을 하는 흐시 얀(Hsia Yan)과 우 말리(Wu Mali)는 과거를 재문맥화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흐시 얀은 <100개의 초상화(1994-96)>에서 고대 중국 문화의 양상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Wu Mali는 <사랑스러운 것들( 1999)>을 통해 익숙한 현실과 상상되는 ‘유년시절의 모습‘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작가들의 출신 배경은 현재 그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다차원적인 환경의 여러 양상들을 반영한다. 흐시 얀은 중국 본토에서 온 이민자로, 1950년대 일어난 대만의 적극적인 ‘현대화‘ 운동 에 지지를 보낸다. Wu Mali는 대만에서 태어나 1980년대 개념 미술 작가로서 활발한 작업 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대적, 문화적, 실질적 차이들을 넘어, 두 작가들은 모두 편협한 분류화를 초월한다. 두 작가는 모두 인간이 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과 정신의 지형학에 대해 고민을 한다: 꿈, 직관, 기억, 허구의 장. 그들은 자신들의 특색있는 접근 방법들을 통해, 이미 고정된 시간의 얼룩과 희미함에 대한 경계선 안에서 이 정신의 꿈의 풍경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할 방법들을 제시한다. 100개의 초상화는 매일 매일, 해를 거듭하면서, 또한 인생의 행로를 거치면서 겪게되는 많은 인간사들을 반영한다. 중국의 고아 처럼 여기저기 전전하며, 17세에 대만으로 건너와, 바깥을 떠돌다 다시 90년대에 대만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성인으로서 세계를 여행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Hsia Yan이 지구상의 어디에 살았건, 그의 작업은 기억의 연속에 영향을 받아왔음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가는 단순히 외관적인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다 - 그것은 정신(spirit)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작가로서의 그의 관심은 인간의 고뇌와 깨달음의 본성에 대해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생성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다. 각 설치 작품들은 계속적으로 다양한 구성과 조합들을 통해 새로운 삶을 보장받는다.
우 말리(Wu Mali)는 대만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독일어와 문화를 전공한 후에 독일 뒤셀도르프 조형예술 아카데미에서 86년까지 유학 생활을 하다 돌아왔다. 그녀의 설치작업 <사랑스러운 것들>은 50명의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사랑스러운 어린이들‘로 함께 모아놓은 이 작품에서 Wu Mali는 ‘기억의 공간에 대한 생각의 재고라 하는 ’기록 보관소(archive)를 재창조한다. 기록 행위의 본질적인 모습은 정보를 수집하는 그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바비 인형이나 장난감 자동차를 수집한다. 반면 그녀는 어린이들의 사진을 수집한다. 이 사진들은 ‘순수한‘ 사진들이 아니다.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역사와/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또한 역사/이야기를 창조해 가는 사람들이다.‘ 해학적 요소와 더불어, 작업의 핵심에는 중요한 시적 관점이 들어 있다. 비록 우리가 이 역사적 인물들과 유명 인사들을 성인으로 인식하지만, Wu Mali는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우리의 습관적, 판단적 지각들을 부수는 작업으로 우리의 인식을 변형시키고자 한다.
 
이 두 작가는 모두 현재의 실체적 특수성을 초월하고 있으며, 무한한 미래를 발견하기 위해 과거와 그 너머에로 이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과 역사에 대한 고정 관념을 넘어, 두 작가는 현실에의 집착이 아니라 꿈의 풍경 속으로서의 여행을 시도한다. 우리가 시작한 장소가 끝이 없는 끝 같은 곳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우 말리(Wu Mali)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꿈꾸고, 성장하고,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새로 시작하는 아기가 있다
동일한 삶의 순환을 가지고.
1993년 마이클 잭슨의 대만 순회 공연 <데이저러스Dangerous Trip>는 초국적문화 산업의 <전지국적> 문화적 상상력이 지역대중의 주체성과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열광은 콘서트장을 거의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였는데, 이것은 전에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를 소위 <혼종적>주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육체 속에는 흑인적, 미국적, 양성적, 초국적, 음반 회사적 특색들이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여러 모로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한면 자기 중심적 게토를 떠나 타인을 내면화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대만 한족 문화의 고정 관념 때문에 흑인들이 항상 차별을 받아왔고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는 지배 문화 속에서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이 현상은 또 대중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문화적 전지구화라는 쟁점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전지구화는 문화 연구가 다루어야 핵심적 쟁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자 <문화적 전지구화>라는 것이 진정 <새로운> 것인가? 전지구화를 <미국화>라는 의미로 고집하지 않는다면 전지구적인 것이란 지역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대만에서 전지구적인 것은 사실상 미국, 일본의 문화 생산품과 소위 뉴 타이완 시네마(New Taiwan Cinema: 예를 들어 미국 시장에 최초로 진출한 영화인 「결혼 피로연」)와 같은 대만의 문화 생산품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뉴 타이완 시네마가 <전지구화>된 것도 할리우드 영화 배급사인 워너 브러더스를 통해서이며, 대만 정부는 이 회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즉 뉴 타이완 시네마의 전지구화의 배후에는 <대만>이라는 기호를 <국제>시장에 끼워 넣음으로써 국민을 개조하고 국가를 재건설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이다. 대만 정부는 이를 통해 국민적 자존심을 높이고 (소망컨대) 유엔 가입 (새로운 국가 건설의 궁극적 목표)을 위해 <미국 대중>들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러한 현대적 형태의 전지구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에서 일본의 문화적 지배는 1879년에 시작되었고, 미국적 <생활 방식>은 1950년대부터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형성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라오케라고 불리는 대만산 발명품인 KTV는 현재 런던, 시카고, 마닐라, 방콕, 뉴욕, 홍콩, 로스앤젤레스, 도쿄, 베이징 등등의 폭넓은 지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것은 식민지적 계보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대만 점령 기간에 들어온 나카시(사업가들이 만찬장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밴드)가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의 MTV(대만에서 MTV 센터는 비디오를 대여해 주는 장소를 의미한다)가 대만에 들어왔을 때 영상이 덧붙여졌고, 그것이 KTV가 되었다. 이처럼 현대 오락 기술이 뒤섞여 만들어진 KTV와 같은 형태는 식민지 및 신식민지 투쟁의 상흔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전지구화는 문화제국주의로 정식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식민지 상태와 현재의 신식민지적 상황을 소위 전지구화와 분리한다고 해서 지역-세계 역사의 변증법적 특수성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전지구화>를 역사 속에 다시 위치시키고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적 역사적 형성과 연결지을 때에만, 전지구화의 궤적이 수세기에 걸친 식민 지배의 역사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첸 순추(Chen Shunchu)
Chen Shunchu는 1990년 초 Taipei의 IT Park의 구성 요원으로서 활동하였으며, 자신의 사진을 이용한 설치 작업들을 가지고 타이완 미술계의 관심을 재빠르게 사로잡았다. 그는 Penghu Archipelago 변두리 지역에서 출생하고 또한 성장했으며, 항상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고향의 흙에서 얻은 영감과 가족에 대한 기억들의 재구성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특징적으로 자신의 예술 작품에 선입적 애호 요소로 흑백 사진을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진들은 특징적으로 자신의 근본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객관적인 리얼리즘의 특색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Chen의 유년 시절의 고향 풍경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일상 모습의 항상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흑백 사진에서 재배열하고 재조직하는 가족과 고향 풍경 안에는 종교 의식이 수반하는 주체적 정서와 신성함의 강력한 혼합이 항상 존재한다. 피상적 단계에서 살펴보면 그의 작업들은 산업 도시 생활의 그물에 걸린, 그러나 농업 시대의 가족 구조와 국토 중심적 사회의 관계들을 그리워하는 시골 작가의 기억을 구원하기 위한 시도로 여겨질 수 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검토되었을 때 그것들은 잊혀지는 공포에서 탈피한 작가에 의해 발전된 자기 구원적인 전략 혹은 그의 가슴에 축적된 분리가 수반하는 강력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으로 보여질 수 있다.
Conference: Family Parade(회담: 가족 행렬)'에서 우리는 개인의 모든 흑백 사진들이 기억의 파편들이며 정서의 조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표현 방법은 관계들의 고리들 사이의 반응을 통해 기억의 파편들을 서로 짝지워 맞추고 정서의 조각들을 재조립하는 조각 그림 맞추기와 매우 유사하며, 완전하게 확장된 가족 개념을 회복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Chen은 혈연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그물망에 대해 강조하며 사회적 유동성에 의한 시간에 걸쳐 창조된 가족 파편화와 감정적 거리를 그려낸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작업이 작업 초기 단계부터 성장 과정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나타내고 있을 지라도,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주 상이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며 타이완에서의 사회적 진보의 단계에서의 보편적인 반영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이클 린(Michael Lin)
Michael Lin은 다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친 후, 1990년대 초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타이완은 문화적으로 그에게 있어 조상적 근원지이지만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친근하면서도 색다르다. 타이완으로 돌아온 후, 그는 다수의 타이완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에서 국내 생활과 문화에서 빌려온 모든 종류의 상징들을 끌어다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진실된 형식들은 거리에 대한 주목할 만큼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Michael Lin의 창조적 예시에 대해 서구 문화 환경에서 형성되고 성숙한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아마도 그것은 타이완 사회와 문화에 대해 거의 냉철한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입장 때문일 것이다. 많은 그의 설치 작품들은 레디메이드들을 사용하여 합리적인 제도화를 거쳐 제작되고, 지역색과 대중 문화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의식적 장벽들의 계승과 상상력의 통제를 해방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작품에 사용된 사물들과 상징들은 대만 역사와 문화와의 연관성을 한눈에 찾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주는 궁극적 목표는 우리를 문화, 시대, 장소를 연결하는 개념적 내용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명료하고 간단한 공간적 설치 기술을 사용하는 그는 한정된 재료들을 사용하여 무한 개념들을 생성해 내고자하며 또한 의미론 적으로 열린 공간 배치를 통해 관람객들의 상이한 행동 반응들을 유도해 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 지능의 다양한 상태를 폭로하고 또한 다양한 사고 진행 단계의 가능성들 또한 드러내고자 한다. 요약하건대, 그의 작업들은 고도의 물질적 경향을 띠지만, 또한 동시에 고도록 철학적이고 통찰적이다.

왕 준지(Wang Junjieh)
Wang Junjieh는 사진 이미지와 기술 매체를 창조적으로 혼합 사용하는 타이완 청년 세대 작가들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다루는 공통적인 주제는 공범(complicity) 구조와 산업 시대의 소비 문화, 그리고 대중 매체의 강제적인 위력이다. 표현 형식의 개념에 있어서, Wang은 소프트웨어(2차원적인 인쇄 재료, 광고 사진,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파일)와 하드웨어(display windows, 자동 판매기, 광고 게시판, 인터랙티브 컴퓨터)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언어학의 패러디와 풍자, 가상 게임 개념, 그리고 장소성 개념의 실제 설치물들을 한꺼번에 접합시킨다. 즉 그는 작품의 완성을 위해 본질적인 요소로써 관람객의 상호교환적 참여를 유도한다. 개념적인 면에서 그의 작품은 모호하고 불명확한 특보들이 넘치는 풍요로운 삶을 원하는 현대인들과 또한 결론이 없고 불명료한 시각의 자유로운 사고의 늪에 빠진 또 다른 모습, 그리고 그들 상태의 모든 종류의 상업적 미신과 허위 광고가 눈 먼 그러나 행복한 소비자들로 무감각해지는 가설들을 실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FOCL은 후쿠오카 트리엔날레에 Wang Junjieh가 함께 참여하는 작품이며 이러한 미적 개념의 발전과 확장으로 논의될 수 있다. 이것은 다양한 멀티미디아의 미로 안에서 발전한 게임이며 또한 전시 공간을 계승하는 가상 판매 행위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모든 매체와 수단들을 통해서 Wang은 동시에 몇몇 구제품들과 두개의 상품들을 일본 대중에게 소개할 것이다. 세 가지 구제품들은 이전 완성 작품들이다. 신상품들은 이번 전시에서 그가 시장에 새롭게 다시 불러오기로 계획한 Loneliness: Underpants Far from the Mortal World(고독: 인간 세상으로부터 먼 바지)'와 Silver Browning: The Revolver for the Spur-of-the Moment Self-Injury(은색 브라우닝: 자학 순간의 충동을 위한 연발 권총)'라는 두 가지 작품들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최근 성인 관심 생산품들을 가지고, 작가는 이번 전시를 다국적 마케팅용의 가상 체계를 개발하고자 한다. 그것들이 일본 대중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킬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어떠한 수준의 소비 욕구가 등장할 것인가는 아마도 작가가 발견하고자 열망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SJ)

우 티엔창(Wu Tienchang)
Wu Tienchang는 타이완의 신 자생 미술 운동을 대표하는 개척자이다. 비록 1980년대 중반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설치 미술이 대만에서 인기를 끌게되었지만, 막 자신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던 Wu는 회화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갖고 작업에 임하였으며, 점진적으로 사회적인 고도의 비판을 받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다수의 그의 초기 작품들은 특정 인물들이나 사회적 혹은 인종 단체의 초상화였으며, 작품 안에는 어둡고 깊은 곳의 도시 방랑자들, 정치적 압력으로 인한 무명의 희생자들,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독재자, 토템화된 대만의 원주민, 그리고 영향을 받은 자기중심적인 fin-de-siecle 신세대들을 포함한다. 1990년대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여전히 사회적 표현체로서의 인간이었으나 그의 스타일은 기존의 아이러니와 풍자에서 블랙 유머로 전향된다. 그는 표현 기법 개념에서 회화의 상호적 조합, 사진 이미지, 음향 효과, 조명 효과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회화의 2차원적이고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멀티미디어 표현의 새로운 국면으로 영입하고자 하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근작들에서 보여지는 퇴폐적이고 향수적인 시각 구조, 영향받고 자기애적인 주제의 표출, 쉼 없는 인간의 욕망 등은 기묘한 부조화의 분위기에서 서로 혼합되고 또 그 안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여기서 모든 상징의 사용은 접근성, 역사적 중요성과 지역적 기원에 대한 그러한 고려를 기반으로 한다. Wu는 가상과 실제가 서로를 반영하고 진실과 거짓이 서로 뒤엉키는 키치적 과장법과 결합 방법을 사용하며, 또한 군사법의 강요에서 시작된 타이완 사회 내에서의 구조적 변화들을 작업을 통해 묘사하고 더 나아가 세기말의 타이완의 군중 의식의 허식과 불안함 또한 반영한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Chen Chiehjen 거리의 비어있는 건물과 지하실, 바닷가와 같은 선택된 공간에서 실험적인 성질의 퍼포먼스 아트를 이끌었다. 그는 1996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일본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Nippon International Performance Art Festival’와 1997년 Quebec의 “Asiatic Performance Art'에 초청을 받았다. 이 전시에서, 그는 ”영혼과 육체의 반란 Revolt in Soul & Body'라 명명된 연결되는 연작을 선보였다. 컴퓨터로 변형을 한 거대한 사진 이미지를 포함시킨 Chen Chienhjen의 “Revolt in Soul & Body'는 처음엔 무척 충격적으로 보여질 수 있으며, 관람객을 그 미개한 야만적 행위로부터 역겨움에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업을 공부하기를 선택한 이에게는, 그 작업은 ”무심한“ 반응이라 그가 명명한 것을 조롱함으로서, Chen의 유머에 대한 어두운 감각을 드러낸다. 그가 행한 것은 이번 세기의 초반부터 중국에서 다루어졌던, 예를 들면 처형, 집단 학살과 전쟁과 같은 ”물질적인 폭력“의 일종이라 작가가 칭한 것에 대한 여러 개의 사진 자료를 차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캔받은 사진들을 컴퓨터에서 그 자신의 이미지와 함께 재배열하고, 재조합하여 하나의 혼합된 작업을 만들어 냈다. 이미지의 자용과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 그는 어떻게 이미지가 이미지와 일생생활의 인식 사이의 관계 변경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20세기 사진의 개념이 ”현실“ 흔적과 기록으로서 충당되는 가에 역시 의문을 제기한다.
원래 사진기록 이미지의 재출현과 Chen에 의한 그들의 재생산을 통해 우리는 선택과 편집 후 관람객에게 제시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조정되었고, 다루어졌는지 볼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물리적 폭력”에 관한 사진기록을 사용하고, 관람객에게 “환영적 현실”의 자각을 고무시키는 “재생산”을 하기 위한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한다. 이 “재생산”과 deja-vu 는 이러한 이미지들의 재집합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깊은 잠재의식에서의 직면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Chen의 요점은 관람객들에게 이미지의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에 중심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사형집행과 집행을 당하는 것, 관찰하는 것과 관찰당하는 것, 창조하는 것과 관람하는 것, 그리고 권력과 대중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역설을 제시한다. 정체성의 여러 층위는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예술가는 관람객이자 심지어 집행자이기도 하다. 관람객은 무언가 빠져있는 교도소의 함정에 빠지지만 그것을 볼 용기는 없다. 마지막으로 관람객은 심지어 더 보기를 갈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본다”는 “욕망”이라는 선천적인 폭력적 특성에 대한 비유의 완전한 과정을 만들기 위해 더욱 심한 “폭력”을 위한 전조가 된다.

왕(Wang)
Wang은 상업적 시스템과 기계 기술을 그의 프로젝트와 연결시킨다. 1994년 사람들이 일반 가게에서 살 수 있도록 그는 상업화된 궁전의 요리비결을 만들어 냈다. 그의 오늘날 이전에는 권력의 상징이었던 왕실의 음식을 아무나 먹을 수 있는 민주적 세계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산물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한 담론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것은 대중의 권력과 그 환영을 만들어내는 열정적인 논평을 산출하였다. Wang이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은 인터넷을 통해 전장과 같은 다양한 가상의 여행 패키지를 판매하는 허구의 여행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여행사에서는, 상상의 여행의 다른 이미지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모니터에 나타나 있었다. 고객이 여행을 신청하면, 그 상품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이미 매진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프로젝트에서 실제와 가상, 인간의 기대와 상상력의 차이는 팝아트의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Wang의 최근 전시에서의작품은 회춘을 불러일으키는 가상의 약인 HB-1750이 거대한 양으로 판매되는 프로젝트로 이루어져 있다. 불사를 가져오는 마법의 묘약은 중국에서 오랜 전통으로 즐겨온 것이다. 전대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는 그들의 노예를 지구의 가장 끝으로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찾도록 하였다. 불로장생의 약을 위한 열망과 그것이 지구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은 중국의 통치자들 사이에서 널리 번진 신념이었다. 불사를 위한 열망의 감각은 인간의 소망에서 궁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만일 사람들이 무엇이든 다시 할 수 있고 그들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그들의 삶에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쇠약해지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HB-1750'은 미술관의 입구에 커다란 입간판과 상업 광고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모니터를 포함하고 있는 미래적 시각을 전시하고 있는 상자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전시용 상자는 Taipei의 예쁜 의상실에도 전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유행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불로장생의 약은 벗어날 수 없데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판매촉진 도구들을 사용하여 Wang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불사에 대한 열망, 돈으로 그것을 사는 것의 의미, 그것의 환영적 성격과 허구,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파키스탄의 현대미술
 
1990년대의 파키스탄 예술은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항한 투쟁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80년대의 질식할 것 같은 비호에서 벗어난 파키스탄 예술의 전망은 꽤 갑자기 넓어졌다. 예술가들은 이제 갓 형성되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혼란한 기능을 흡수할(assimilate) 다양한 방법을 찾아냈다. 초기의 압박은 여성아티스트들의 시대 도래와 나란히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상징과 의미가 발전하는 배경을 마련했다. 이런 시대가 물러가자, 90년대에는 다른 문제점들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민주주의 실행과정(process)의 연약함, 경제적인 불균형, 성적인 착취, 종파심 강한 사람, 윤리적인 폭력은 회화, 조각, 멀티미디어 작업을 통해 제 목소리를 찾는다. 어쨌거나, 공공연한 정치성은 사회의 개인적 해석으로 다시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직관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한 기법(상징, vocabulary)의 의식적인 재해석이 될 수도 있다. 증가하는 도시화로 예술가들이 관여하는(engage) 많은 신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기술의 증식은 객관적인 익명성을 약속하는 듯한 겉껍질을 제공한다. 그러나, 전기가 여러날 술래잡기를 할 때면 예술가들은 다른 재료로 옮겨간다. 퍼포먼스, 특히나 여성의 춤이나 연극의 사회적인 금기도 역시 역설적이다. 몇 세기 동안 수피(Sufi)교도들의 사원에서는 성자들의 발명품(intervention)을 추구하며 남자와 여자가 춤추고 기도를 노래해왔다. 핑계(subterfuge)와 찬양은 모두 가능하다. 그리고 다수주의(plurlism)은 필수적으로 퇴거한다. 그러나 현대 작가들은 퍼포먼스 아트에 있어서는 조심스레 행동해야한다. 작가들은 어제와 내일의 접점(cross fire)에 있다.
중견 회화작가 자후르 울 아크라크(Zahoor ul Akhlaq)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의 작업은 항상 중앙 아시아, 이란과 다른 회교도 국에서 아대륙(subcontinent)으로 흘러 들어오는 문화유산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어떤 형태의 종교부흥주의(복고주의 revivalism)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모든 형태들은 엄격한 지적 선별을 받았다. 그는 이슬람의 기하학 도형을 탐구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내면의 신성으로 방문(A visit to the inner Sanctum)>이라는 제목의 시리즈에 인간의 형상을 연구했다(dwell on). 새로운 도해법(iconography)은 동시에 복잡하고 빽빽하고 찬양적(celebratory)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정교하게 짜여지고(textured), 끊임없이 꾸며진(worked) 대형 캔바스 작품은 <이슬람 현대 예술의 기억과 근대성(Memories and Modernities Contemporary Art from the Islamic World)>라는 전시의 일환으로 이스탄불 돌마바세(Dolmabahce)성에서 열렸다.
인간의 형상은 여러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난다. 코두스 미르자(Qoddus Mirza)의 회화에서 인간의 형상은 통렬한 유머와 신중한 소박함으로 사용되었다. 90년대 그의 회화는 조롱하는 투(tongue in cheek)의 낙서의 내러티브와 어린아이 같은 시각기호(visual vocabulary)로 정치적인 이야기 등, 예술사의 짐에 대한 탐구까지를 포괄한다. 어떤 점으로는 최근의 작품은 ‘회화에 대한 회화’이다.
사미나 만수리(Samina Mansuri)의 작품에서는 내용이 우선한다. 성, 신(authenticity; 확실성), 이데올로기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이미지를 포함한다. 작품은 말그대로 땅에서 얻어진 재료로 구성되어있다. 작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회화의 전통으로 보여진다. 나이자 캄(Naiza Khan)과 수마야 두라니(Summaya Durrani)는 다른 환경에서 여성의 상징과 성에 우려를 표한다. 정치 데모에서 두 여성이 공개적으로 분신한 사건은 나이자 칸에 의하여 글과 그림으로 책에 기록되었다. 수마야 두라니 는 표면과 크기를 극대화한다. 레디메이드 이미지와 참혹함(savage)을 이용하여 mark-making(공예법의 일종)을 확장한다.
흥미롭게도 나이자 칸과 수마야 두라니, 두 작가 모두에게 관능적인 표상(emblem)과 Graphic으로써의 여성의 털은 중요하다.
파이자 버트(Faiza Butt)와 아스마 문드라왈라(Asma Mundrawala)에 의해, 성에대한 질문이 트럭 아트나 영화 포스터에서 대중 도시 단어(popular urban vocabulary)에 도입되었다. 이것은 신(authenticity)의 조력을 호소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더 많은 관중에게 이야기하고 대화를 유지할 필요성 때문이다. 파이자 버트는 남성 우월적인 사회의 불균형을 강조하고 종교적이고 다른 지표(other indicator)를 조롱 조로 사용한다. 아스마 문드왈라의 작업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yet to take place) 지독한 해프닝과 기억들로 더욱 위협적이다.
 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스토리 텔링이 샤지아 시칸더(Shahzia Sikander)의 회화의 원천이다. 그녀는 라호레의 국립 예술 대학(National Colleger of Art in Lahore)에서 세밀화(miniature painting)를 전공하였다. 현재 그녀는 뉴욕에 거주하며, 국제 예술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전통적인 세밀화 기술에 기반한 예술가로서 그녀는 그녀의 작품에서 많은 분리(divides)와 세계에 다리를 놓았다. 다양한 소스에서 이미지를 추출하고 그녀와 다른 이들이 외관상으로는(seemingly) 세계적이고 증가적으로 편협한(parochial) 세상에서 경험하는 다수의 현실을 탐구한다. 재료, 매체, 크기를 탐구하면서 샤지아 시칸더의 예술은 스테레오타입과 믿음을 조롱한다. <우리 사회의 가면(Our Social Veil)>이라는 그녀의 작품에서 풍자가 풍부하다. 그녀는 쉽게 인스톨레이션과 멀티미디어 작업으로 옮겨갔다.
최근 파키스탄 예술가들은 작품 스케일에 다양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전통예술에 있어서는 작은 것과 복잡한 것들을 훌륭히 여겼다. 세밀화를 연습하고 공부하는 매력은 주요한(major) 부활을 가져왔다. 과거를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발명하는 도전이었다. 임란 쿠레쉬(Imran Qureshi)와 탈하 라도르(Talha Rathore)는 ‘와슬리(wasli) 레이어들로 표면을 세공하고 모양(visual appearance)을 변형시키며 작업했다. 임란 쿠레쉬의 이미지와 아이콘은 다시 맥락화하되고(recontextualized), 휴머와 재치로 그들의 의미를 변형했다.
마수마 시에드(Masooma Syed)의 작은 회화가 붙은 조각(painting-cum-sculpture)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수의 스티치와 보석 세공의 복잡함이다. 관객을 둘러싸거나 덮는 인스톨레이션 보다는 좀더 가까이로 끌어당기고 다가오게하는 크기의 작품에 이야기가 담겨있다.
고급예술(high art)과 대중예술의 차이는 어느 사회에서나 예술가들의 염려거리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경우 이들의 분리는 더욱 엄격하다. 90년대의 예술가들은 공예의 절차(도시의 것이던, 농촌의 것이던)와 이디옴(idiom)을 도입하여 이들의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사회에서 공예 장인의 생산물의 문제는 의심되고 있다. 새 고객은 익숙지 않고 정의하기 어렵다.
두리야 카지(Durriya Kazi), 데이빗 에일스워쓰(David Alesworth), 이프티카 다디 (Iftikhar Dadi), 엘리자베쓰 다디(Elizabeth Dadi)는 갈라진 사회에서 예술 작업을 하는데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썼다. 그들은 인스톨레이션을 구성하기 위해 트럭 아트를 생산하는 도시의 공예인들과 함께 일했다. 이 인스톨레이션은 트럭아트 뿐 아니라 다른 다양한 환경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대중적인 형태들을 포함한다. 두리야 카지와 데이빗 에일스워쓰는 <아르 제 마우드(Arz-e-Maood)>나 <약속받은 땅(The Promised Land)>과 같은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생산했다. 이들은 카라치 공원(Karachi public park)에 설치되었는데, 방문객들을 위한 대답/소원을 적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 인스톨레이션은 음악, 비디오, 대중 회화을 이용하여 몽환적, 환상적으로 혼합했다.
 
알함라 아트 센터(Alhamra Art Centre)에서 열린 <여성의 (Womens Scape)> 전시는 여성아티스트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여성 공예 제작가와 라호레의 미술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이 전시는 여성 기술공과 여성 예술가의 공동작업을 초래하였으며, 여러 단계에서의 교차점(intersection)을 창출하였다. 학생들의 인스톨레이션은 개개의 작업과 통합되어 여성의 삶에 있어서의 포괄적인 환경 선언을 만들어 낸다.
위에 나열된 모든 예술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극적인 유희성은 각각의 작가, 창조자가 사회의 심려 깊은 안테나임을 나타낸다. 그 혹은 그녀들은 분쟁, 긴장, 압도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밀착하는 원인으로 행동하거나, 사회 현실을 비추거나(holding up mirrors), 다리를 놓거나, 논의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샤치아 시칸더(Shahzia SIKANDER)
그녀의 종이 위에, 그녀의 벽화에 그리고 그녀의 환경적인 설치작품들에 그녀는 동양과 서양을 혼합하고 전통은 형태를 정의 짓고 그녀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창안하거나 끌어낸 것들과 기술이 융합된다. 시칸더는 1969년 파키스탄의 라호레에서 태어나 살아오면서 고대 도시인 모갈에 있는 국립미술대학에서 미니어처 회화를 전공하고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 스쿨과 휴스턴에서 공부한다. Bashir Ahmed의 길드 같은 워크샵에서 미니어처 회화를 공부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은 특별한 결단력과 헌신이 요구되는 분야로 반전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최근에는 그녀가 그 매개로 성공하고 국제적인 미술 세계에서 그녀의 작품들에 관심을 갖자 더 많은 학생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많을 시간의 관찰과 보고가 필요하며 그녀 자신의 작품은 섬세한 그림들의 그리는데 필요한 종이, 안료와 붓들이 모두 준비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 그녀의 논문작품인 The scroll 1992는 6피트가 되는 가로의 지름과 현대적, 자서전체와 일상의 주제 의식을(TV보기, 여행을 가지 위해 가방 싸기, 현대식 부엌에서 요리하기) 포괄하여 관습을 확대시켰다.
더 많은 공부와 미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보다 넓은 범위의 예술적 활동과 이론들은 Sikander의 작품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 그리고 identity politics(1990년대 미국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과정)와 같은 강연에 노출은 Sikander로 하여금 그녀의 작업을 보다 개인화하고 새로운 형식의 영역으로 범위를 확장하도록 자극하였다.
예를 들어, 그녀가 휴스턴에서 거주하는 동안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2가지의 다른 독자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다: 평평하게 칠해진 건축 벽화; 그리고 휴지에 개인적인 것이 추상적으로 표현된, 원시적인 여성의 감성이 드러나는, 잉크 그림. 앞으로 수년간 미국 전역에서 전시를 하기 위해 새로운 작품들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기법은 완전히 터득된다. 미니어처 작품들과 비교하여 재료나 감성적인 색조와 비율에 있어서 너무도 다른- 또한 서로- 이러한 기술들은 결국에는 Sikander의 현재 극단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재료를 혼합하는 접근방법에 스며들 것이다.
그 예로, The hoods red rider 1997라는 미니어처 회화에서 우리들은 베일로 가린 팔다리가 긴 여자가 그녀의 여러 손에 다양한 무기들을 휘두르며 작가가 설명하기를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로지 서로 연결된 뿌리의 얽힘을 근거로 하여 발은 없지만 풍부한 이 대지의 여신은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고 작가 자신처럼 지구의 어떤 부위와도 접촉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인도에서는 금을 지켰다고 전해지는 the griffin은, 독수리의 머리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괴수, 가끔 이슬람교의 베일을 쓰고 그녀의 작품에 등장한다. Silkander에게는 여성의 전통적인 의상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그녀가 항상 입고 있어서가 아니라 풀어질 수 없을 정도로 특히 서양적인 사고에 이슬람 문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서양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이 베일이 외양적인 정체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어려운 상징이지만 많은 파키스탄 여성들에게는 공동체와 일종의 자유를 부여하고 Sikander는 이를 여성 문화의 상징으로 본다. 여성 모습이던 griffin을 우아하게 하던 또는 공중에 추상적으로 날아다니던 간에 Sikander의 베일은 여러 상태로 등장한다: 견고한 덫 같은 마스크, 풀어질 듯 찢어질 것 같은 상태의 그물과 같은 형태 또는 그녀의 벽화에 느슨하게 떠다니는 반투명하게 겹친 휴지들.
Sikander 의 최근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성들을 탐구하고 싶은 욕구에 의해서 추진된다. 그녀는 연수하는 동안에 여러 개의 작품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사용하는 재료와 이미지들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보다 많은 시간들이 주어졌다. 그녀가 설명하기를 ‘이것은 회화에 더 가깝다-과정의 일부분은 첨가하기, 바꾸기, 옮기기다. 내 스튜디오에서 기획되고 색을 칠한 후에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바로 전개되는 작업이다’. 근래까지는 미니어처, 벽화와 휴지 위에 잉크 드로잉은 다른 구성 요소로 따로 보여졌지만(그러나 가끔은 한 벽면에) 지금은 다른 표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작품에 가깝다. 그녀의 새로운 방식에도 불구하고 Sikander의 작품은 여전히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힌두와 이슬람의 이중적인 문화들이 그녀의 관심에 깊이 연결되어있다:
나는 이러한 과정들이 양쪽을 모두 탐구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념, 본질과 추상에 초점을 둔 이슬람의 미니멀적인 접근을 즐긴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전통적인 미니어처 양식들에 추구되는, 감각적이고 신화적인 요소와 장식적인 형태로 끼어 넣은 성적인 표현을 힌두교의 감성적인 관점도 접목시킨다.
Sikander는 비록 최근 작품들에서 형태와 패턴을 겹치는 기법을 많이 사용했지만 APT3에서는 틀에 끼워진 여러 개의 미니어처들을 선보일 것이다. 다른 주요 작품은 뉴욕 스튜디오에서 미리 계획된 벽화와 휴지에 그림을 그린 것을 합쳐서 겹친 이미지들을 환기시키는 벽화 설치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크고 작은, 어떤 것은 아주 섬세하게 그려지고 또 다른 것은 잉크로 살짝 스치고 지나간 이미지들을 배열할 계획이다. 한 부분은 직접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고 또 다른 부분들은 부분적으로 아니면 완전히 휴지로 가려져 벽에 살짝 부착된다. 이러한 작업들로 Silkander는 이러한 포스트모던, 후기 식민주의적 세계에서는 주체성과 문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또 우리가 보고있는 것은 계속해서 명쾌함의 안 밖으로 옮겨다닐 것이라고 상기시켜준다. 그녀의 매력 있는 고정된 미니어처 이미지들과 겹쳐진 베일의 형상에서 Sikander는 이러한 초월적인 상태는 좌절스러운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것이라고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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