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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⑩-2

이영철

방글라데시의 현대미술


방글라데시의 인구는 1억 4000만명으로 세계
8위이고 인구밀도가 아주 높다. 1971년의 독립 전쟁(liberation war)은 자신들의 인생을 낙관적으로 여겼던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늪으로 떨어뜨렸다. 전쟁 후, 가치의 타락과 새로운 삶을 건설하려는 열망이 병치되면서 방글라데시 현대 예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건강한
사회에 대한 꿈은 늘 인간을 현혹시킨다. 희망을 무참히 저버리는 감당할 수 없는 지속적 경험은 사회적인 삶의 균형을 완전히 파괴한다. 방글라데시
사회는 너무나도 힘든 사건들로 가득 차있다. 살인, 강간, 천박한(vulgar) 매스미디어에 대한 분노, 검은 돈(black money)의
부정적 영향은 인간 존재의 조화를 깨트린다. 방글라데시의 현대 예술은 현대사로 인해 고통받아온 삶의 극심한 불안과 기근, 난처한 상태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사실적 기준에만 의지할 수 없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분석적인
사실주의(analytical realism)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그림이 등장했다. 인간 삶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다양한 회화적
실험으로 표현되었다. 란지트 다스(Ranjit Das)의 화폭에는 인간의 얼굴이 여러 원들로 둘러 싸여있거나 수많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어떤
때는 재현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 얼굴 전체도 아니고 단순히 눈만이 굵은 선에 둘러 쌓여 있다. 알락 로이(Alak Roy), 디알라 베굼
졸리(Dilara Begum Jolly), 시쉬르 바타카지(Shishir Bhattacharzee)와 몇몇 사람들은 형편이 나쁜 현대 생활의
광경을 시각화하려고 노력했다. 알락은 얼굴에 천박한 표정을 남기면서 악의 힘을 조롱했다. 시쉬르는 신랄한 풍자로 그의 사회적 행동의 출구를
찾는다. 졸리의 화폭은 짐승들로 붐빈다. 이 짐승들은 모든 사회악의 음흉한 존재를 진화시키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다. 붉은색과 보라색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이들 예술가의 작품은 현재 시기의 공포스러운 드라마를 표현하려 한다. 로키아 술타나(Rokeya Sultana)의
<마돈나>는 사실상 거지 어머니와 아이이다. 그녀의 사진 표면의 몇 개의 구부러진 선과 점들은 어머니와 아이에게 가난이 준 타격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키아의 그림에서 인간 존재는 거북한 상황에서 환상 외에는 어떤 출구도 없는 세계에 갇혀있다. 니오파
샤만(Nilofar Chaman)은 신비스럽고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인간을 타이른다. 나질레 라일라 만수르(Nazlee Laila
Mansur)의 주제는 일상 생활의 단조로움을 표현한다. <기다림>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열정과 사랑의
부족함이 남자와 여자의 결속을 약하게 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의 남자와 여자의 형상은 사랑의 따듯함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풍부한
색채의 의상, 장식은 이러한 후회스러운 상태를 강조한다. 색의 풍부함과 모든 다른 장식들은 동양 예술에서와는 반대되는 뜻을 의미한다.


열대 국가의 풍부하고 화려한 식물은 현대 생활의 소란스러움이 일으키는 질환의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한다. 푸른 잎은 정신의 누추한
상태를 위로 하는 끊임없는 원천이다. 작가들은 다양한 식물의 형태를 분리하고 재구성하는 그림들을 많이 그린다. 열대 밀림을 스케치하며 예술가는
자연에서 초현실주의를 발견하기도 한다. 몬수르 울 카림의 화폭에는 이와 다른 자연의 형태와 색깔의 혼합이 밀집해 있다. 그의 작품은 얼어붙은
음악 같다. 자연의 멜로디를 묘사하는 색과 선의 움직임과 농담의 차이가 인상적이다. 자말 아메드(Jamal Ahmed)는 포스터와 같이 분명한
언어로 주제를 표현한다. 환경운동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의 작업에서 자연과 인간의 건강한 공존이 세계 혹은 인간문명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을 구하라>에서 큰 밑동의 나무 가지를 밀집시켜 자연의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그려낸다.
방글라데시 예술가들에게도 ‘현대 예술가는 자신의 나라의 문화적 유산을 존중해야한다’는 말은 일종의 격언이다. 현재의 삶이 너무도 힘든 사회
속에서 신화의 힘을 느끼기 위한 명상은 이들 예술가에게 필수가 되어버렸다. 방글라데시 국민에게는 국가의 힘을 재생시키는 현실적 노력과 함께
예술가들은 오래된 과거의 영광과 신화와 전설의 힘을 다시 연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일환으로 유명한 베훌라(Behula)신화가
재해석되고 있다. 베훌라는 강한 여성 캐릭터이다. 그녀는 인드라(Indra) 신의 재판소에 가서 죽은 그의 남편을 다시 살려내라고 요구했다.
그녀의 남편은 뱀에 물렸다. 타룬 코쉬라는 작가는 재혼한 베훌라의 꿈과 삶의 절규를 화폭에 그리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달리 알 마문은 인드라의
재판소를 향해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는 베훌라의 여행을 기하학적인 구조로 그렸다. 모하멧 이크발(Mohammed Iqbal)은 1990년대의
유망한 젊은 예술가이다. 그는 신비스러운 음유 시인의 삶에 매혹되었다. 표면의 대부분을 어둡게 유지하며, 인간 형태의 부분적인 묘사와 다른
오브젝트들을 묘사하며 이크발은 형태와 내용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열망한다. 마부르 라만(Mahbubur Rahman)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피와 산소가 제 시간에 공급되면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 존재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방글라데시 예술가 중에는 설치 작업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설치 작업으로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나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 그것은 거의 생각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드물게 아소카 카르마카르(Ashoke Karmakar)는 그의 작품
<어둠의 시대>에서 다양한 자료를 사용하여 전쟁 중의 나라의 끔찍한 상황을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이 작품은 빛과 음악의 효과로 더욱
강렬해진다. 그는 다종교 국가의 대량 학살을 표현하기 위해 소재를 조심스럽게 골랐다. 불에 탄 이슬람의 성경, 십자가, 힌두교와 관련된 의상이
그의 작업을 서사적인 응집성을 높여준다.


참조:방글라데시 분쟁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이후 전개된 민족분쟁은 인도의 독립 및 인도, 파키스탄간 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47년 8월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할 당시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인도대륙에는 힌두교도의 인도, 이슬람교도의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존재하게 되었다.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약
1,60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파키스탄은 원래 1905년 영국의 통치시 행정구역상 동 벵갈지역로서, 서벵갈이 인도에
편입됨에 따라 이중적(동․서 파키스탄 및 동․서 벵갈) 분리를 맞게 되었다. 1950년대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같은 종교적 유대를 갖고
있었으나, 언어와 문화가 상이하였고, 경제적으로도 보다 낙후된 지역이었다. 더욱이, 동파키스탄의 수출 수익금과 외국의 원조가 대부분 서파키스탄에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파키스탄 고위관리는 대부분 서파키스탄의 파견원들이 독차지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같은 상황의 지속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에는 1965년 국가비상령이 선포되었고, 1970년 11월 대홍수로 인해 20만이 사망하는 참사 후 서파키스탄의 지원이 지연된 것을
계기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다. 1971년 3월부터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과 서파키스탄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해 수백만의 난민이 인도로 월경하였고, 인도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 동파키스탄을
방글라데시로 독립시킴으로써, 서 파키스탄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1971년 12월 방글라데시 정부 수립 시 국내에는 다양한 무장세력이
존재하였는데, 방글라데시 동남부의 몽고․불교계 소수민족인 차크마(Chakma)족은 영국의 지배하에서도 자치를 경험하였고, 1971년 JSS,
SB (Shanti Bahini) 등의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자치를 위한 무력투쟁을 시작하는 한편, 비하리스 지역거주 파키스탄인 25만은
방글라데시 국적취득을 거부하며 자치를 요구하였다. 이외에도 인도의 지원을 받는 서 벵갈 무장집단, 그리고 내부적으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위해
수년간 활동한 무장조직들도 독립 후 해체되지 않았다. 정부와 무장조직간의 충돌은 대부분 게릴라전으로 폭동․테러의 성격을 띄고 있으나 충돌 초기인
1974-75년에는 대규모의 전투가 발생하였고, 초대 대통령인 라흐만(Rahman)이 1975년에 피살되었다. 90년대에는 야당 연합을 중심으로
다양한 반정부활동 및 폭력사태가 지속되다가 1999년 후반기에는 모스렘 집단간의 충돌이 지속되었고 인도와의 국경충돌 문제가 방글라데시의 분쟁은
지형적․역사적인 이유로 여파가 대부분 서남아에 국한되어 있고, 1970년 수백만의 난민이 인도로 월경하였다. 그러다가 1988년 9월 미얀마의
군정 출범이후 수십만의 회교도 난민이 오히려 방글라데시로 유입되기도 했다. 정국의 지속적인 불안정으로 인해 차후 분쟁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라오스의 현대미술


라오스(Laos)는 세계에서 오래된 전통과 독특한
문명을 가진 국가 중 하나이다. 그 전통과 문화는 Lao 인민공화국(PDR) 독립과 연방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 단체들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다. 지리학적으로,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국가이다. 주민은 라오 췡(Lao Theung)(고원지대에서
살아가는 종족 집단), 라오 숭(Lao Sung(혹은 고산 지대에서 살아가는 Hmong 종족 집단), 라오 룸 (Lao Lum(평원 지대에서
살아가는 종족 집단), 이 3개의 커다란 민족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십 개의 방언이 있지만 라오(Lao)가 표준어이다. 세 집단은 각기
약간씩 다른 전통과 믿음을 지키는 수십 개의 종족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과로 라오스의 예술적 삶과 창작은
다양하다.

14세기에 차오팡움(Chaophangum) 왕이 란장 (Lanxang) 왕조(백만 코끼리의 왕조)를 세운 이래, 그는
(불교) 미술의 발전을 가져다 준 불교를 국가에 도입하였다. 란장 문화는 16, 17세기의 세이세트하티하트(Saysetthathirath)와
카오 술리야봉사(Chao Souliyavongsa) 왕의 통치 하에 라오스 미술의 황금기를 보았다. 지역의 회화와 조각, 공예, 부처 이미지의
성상이 장식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 되었고, 왕조의 빠른 문화 발전으로 잘 알려진 랑상 왕조의 전체에 걸쳐서 세워진 불교
사원은 1641~42년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방문 받기 시작한 후, 1642~47년부터 이탈리아 선교사들에 의해 알려졌다. 왕조 문명은
18세기에 술리야봉사(Souliyavongsa) 왕이 죽은 이후에 발전을 멈추었고, 그 결과로서 왕조는 3개로 분할되었다. 19세기에는 왕국은
시메세(Siamese) 푸에도 군도 사람에 의해 식민 지배를 겪게 되었고, 그 오랜 문명의 열매는, 특히 비엔티안느(Vientiane)에서는,
불운하게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고대 벽화와 회화, 조각은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
지방의 와트 지엔통(Watt Xiengthong), 와트 메이(Watt Mai), 와트 타(Watt Tha), 탐 팅(Tam Ting) 동굴과
다른 많은 곳의 마을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이것과는 별개로 Champas을 비롯한 지역의 지엔콩(Xiengkhoang), 와트 포우(Watt
Phou)에서의 Plan of Jars는 고대 라오스 문명의 심오한 표현으로서 세계에 보여지는 또 다른 국가 유산이다.

1983년,
라오스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서구 예술과 문명에 의한 영향과 효과가 시작되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지도 하에 인도차이나
사람들의 자치를 위한 오랜 투쟁의 결과로서 Laos의 독립은 제네바 협약에서 인증받았다. 이러한 사건이 서구 문명의 영향을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국가 내부에서 서구 문명의 더 깊은 영향은 라오스의 비밀전쟁의 결과로서 더욱 심화되었다. 도시인들은 그들의 전통의상인 남자의 자롱
(Xalong)이나 여자의 신(Sin) 대신 슈트를 입었다. 가옥 구조와 프랑스식 건출물은 여기저기 보여진다. 예를 들어 비엔티안
(Vietiane)의 파툭재(Patouxai) 아치는 파리의 Arc de Triomphe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서구 미술은 공식적으로는
1959년 라오스의 첫 미술학교인 Ecole Nationale des Arts Lao(fig.1)의 공식적인 설립으로 소개되었다. 학교를 위해
고용된 선생님은 지역 집단 소속이었지만 국가의 다른 와트( Watts)로부터의 화가들도 있었다. 이런 미술학교 설립의 목표가 전통적인 라오스
미술을 계승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미술의 영향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학교 출신의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의 주제로 향수와
전통을 전하는 인상주의자가 되었다. 시골 풍경과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나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와 같은 외국에서 수학한 일부 다른 작가들은 현대미술을 염두에 두고 돌아왔다.

국가가 해방되고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1975년 이후 미술이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게
된다. 전쟁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경제시스템 건설의 필요와 함께 정부는 국가적 유산을 유지 보수하기 위한 지도방침을 상정했다. 1990년에
“라오스 예술가 연합 후원을 위한 위원회 Committee for Founding Lao Artists Association'가 정보문화부
Ministry of Information and Culture 산하에 생겨났다. 이런 중요한 사건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태국, 프랑스 등에서
수학했던 나이든 세대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전문 작가들이 활발하게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에서 수학한 젊은 세대에게는 문화적
유보(reservation) 활동을 이끌었다. 전쟁 동안 파괴도고 손상된 사원들은 관광객에게 문을 열기 위해 재건하거나 수리하였다. 여기에는
비엔티안느 (Vientiane)의 와트 시사케트(Watt Sisaket(fig.2), Ho Phr마대, 와트 심으왕(Watt Simeuang)
등과 다른 지역의 더 많은 예술적 지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예술 공모전과 전시 역시 장려되었다. 아마추어 작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었던 국가적 규모의 첫 전시는 1986년 조직되었다. 이 당시 거의 모든 작품들은 진짜 예술적 세계를 소개하는 그 당시 지방의 구매자를
끌기 위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초상화나 비엔티안느Vientiane의 닷 룽 토웨(That Luang Tower), 참파삭
(Champasak)의 와트 포우Watt Phou, 지엔콩(Xiengkhoang) 지역의 통 하힌(Thong Haihin) (or Plan of
Jars) 등과 같은 풍경화는 모든 작가들의 주제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에서 매우 훌륭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겨졌다. 두 번째
국전(The Second National Art Competition)은 1990년 조직되었다. 15명의 작가가 이전에 보여진 바 없었던 다른
스타일의 250개의 작품들로 전시를 맡았다.

339개의 작품으로 수십 명의 작가들을 매료시킨 행사가 호주
국립미술관(Australian National Art Gallery)의 도움 하에 1993년 1월 개최되었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추상,
판화, 조각 등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이 전시의 성공은 연례 개인전과 단체전들을 이끌어내게 된다. 라오스 작가들은 방글라데쉬, 인디아,
네델란드, 일본, 베트남, 필리핀, 쿠바, 프랑스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라오스의 미술가들이 여러 나라에 동시에 알려지게 해준 것은 1994년
일본에서 개최된 4회 아시아 아트 전시에 참여한 것이다. 라오스 미술 협회는 제1회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제5회 아시아 미술전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와, 국민, 그리고 전통을 아시아 인접국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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