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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문화는 장구한 투자와 설계가 필요하다.

백지숙

어쩌다 외국여행을 하다보면 끊임없이 속으로 한국과 비교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풍경이야 별다른 사심 없이 그런 대로 즐길 만 한데, 문화적 ‘경관’을 대하면 이런 비교의식은 끝을 모르고 치닫기만 한다.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닌데 떠나 온 조국은 커다란 짐보따리처럼 등뒤에 찰싹 달라붙어 길 떠난 여행객을 무겁게만 한다. 이러 저런 이유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칼스루헤를 거쳐 이태리 베니스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경로를 잡은 이번의 빡빡한 여행에서도 그 짐을 덜어내진 못했다. 


세계적인 미디어센터로 유명한 칼스루헤의 ZKM은 우선 예상보다 큰 규모 때문에 놀랐고(이건 사실 그렇게 놀랄 만 한 것도 아니다. 스케일로 치자면 우리도 꽤나 큰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또 그 스케일에 비해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두 번째 놀랐다. (이건 좀 그랬다. 많은 투자를 해서 만들어 놓고 관객들이 떼로 몰리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당장에 책임자들을 중징계 해야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는 않을꺼면서). 구석에 붙어 있는 검소한 어린이 놀이터도 의외였지만 그 넓은 광장을 별다른 설치물 없이 비워놓았다는 점도 특이했다. 나중에 돌아와 독일에서 오랜 동안 거주했던 한 건축가에게 물어보니 그 광장은 장기적으로 공원 등을 유치할 도시계획 때문에 비워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인 계획, 그것도 문화적인 프로젝트에서의 장기성 - 사실은 문화야말로 장구한 투자와 설계가 필요한 것인데 - 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전혀 실감되지 않는 낯선 말이다.<프랑크푸르트의 현대미술관 MMK는 미술관으로서는 치명적인 형태의 부지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채꼴 모양의 전시관 내부로 들어가 보면 오밀조밀한 공간구성이며 그에 적절하게 배치된 설치 및 영상작품들이 꽤나 설득력 있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는 악명 높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물이 부지의 형태나 입지조건의 한계 때문이라는 변명이 별로 설득력 없다는 사실을 바로 반증해준다.) 게다가 설치된 작품들 중 상당수는 움직이는 것들인데, 이때 움직이는 것은 영상이나 키네틱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퍼포먼스를 한시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대학교 학생들이나 ‘자봉’들이 미술관에 상주해서 전시시간 내내 인터랙티브 아트를 구현하고 것이다. 국공립미술관이 전시공학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관장선출이 문제될 때만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되는 한국의 국공립미술관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다른 일정 때문에 단 한 군데 미술관도 가보지 못했지만 언뜻 관광책자에서 몇 백 개의 미술관을 할인해주는 패키지 티켓을 판다고 하는 문구를 보곤 얼른 책을 덮었다.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정보들을 기초로 우리나라도 시도단위별로 미술관 수를 늘려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힘을 받을까봐 두렵기도 해서였다. 역시나 단순비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음 번 외국여행 때는 억지로라도 비교를 하지 않으면서 즐기는 훈련을 해야할까?. 아니면 아주 자주 외국을 나가서 이런 ‘국경 피로’를 자연스럽게 없애는 것이 더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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