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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화적 퍼포먼스'로서의 월드컵 축제

윤진섭

4천 5백만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월드컵 축제도 끝났다. 아쉽게도 독일에게 패함으로써 결승 진출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전국 방방곡곡의 거리와 광장, 공원에서 펼쳐진 우리의 성숙한 응원 문화는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지연, 혈연, 학연 등 그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됐던 온갖 부정적 요소는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라는 우렁찬 구호 소리와 함께 깨끗이 씻겨나갔다. 드넓은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운 750만 붉은 악마의 응원 모습은 우리 민족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의 물결이었고, 환희의 절정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장엄한 퍼포먼스였다.

우리가 언제 이처럼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맛본 적이 있었던가. 툭하면 반공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광장에 집결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는 40대 이상의 국민들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의 붉은 색을 이제 새로운 감회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에게는 붉은 색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북한을 연상시킨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국전에서 낙선을 해야했던 어처구니없는 시절도 있었고, 심지어는 가르마도 왼쪽으로 타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거리 응원전의 모습은 하나의 새로운 의식 혁명임에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결이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닌, 스스로의 열정에 의한 참여인 것이다. 현대예술의 용어를 빌면 관객참여(audience participation)인 셈이다.<붉은 악마의 응원 장면을 항공 촬영한 사진을 보면 온통 거리에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붉은 색 일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우리 국민들의 무한한 창조력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붉은 색과 태극기를 소재로 다양한 독창적 아이디어들이 무명의 예술가들(?)에 의해 표출되고 있다. 보디 페인팅에서부터 가면, 의상, 응원용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미술이 있고, 연극이 있으며, 음악(난타)이 있고, 무용이 있다. 이 모두를 총칭하여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라고 부르자. 정규미술시간이나 음악시간에는 발휘되지 못했던 기발한 예술적 아이디어가 이 해방의 축제를 통해 마음껏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훌륭한 예능 실습의 현장을 본 적이 없다.

암울했던 70년대의 군사독재 시절에 태극기는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 무렵 국기강하식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면 아무리 바쁜 사람도 가던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만 했다. 당시 길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를 바라보며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혹시 태극기는 가까이에 있었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멀리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보라. 오늘 우리의 밝고 티 없는 신세대들은 태극기를 이용해 만든 멋진 모자와 악세사리, 옷으로 치장하고 거리를 누비고 있지 아니한가? 태극기는 이제 외투처럼 무거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애완동물처럼 친근한 우리의 벗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억압과 통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과 창조, 승화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월드컵 축구를 기폭제로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의식의 물갈이가 시작되는 첫 신호탄인 셈이다.<붉은 악마들이 펼치는 거리 응원전을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 퍼포먼스로 간주할 때, 이제 우리 사회가 집단적 반성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이 자명해졌다. 반성은 개인의 경우 혼자 고독하게 이루어지지만, 집단적인 양상을 띠면 다양한 표현 형식과 기호를 빌리게 된다.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등이한데 어울려 총체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말 그대로 집단적 퍼포먼스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탁월한 인류학자인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문턱성(liminality)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빅터 터너에 의하면, 리미널(liminal)한 순간은 '잠재력과 가능성이 충만한 상태'이다. 매일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법과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운데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극적이며 광휘에 휩싸인 순간이 바로 리미널한 경지인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영광되고 축복된 시간이 바로 리미널 한 순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정치적 쟁투와 경제적 불황, 이념의 갈등을 초월하여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열 수 있는 기폭제가 바로 이번의 월드컵 축제인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이 보여준 위대한 한판의 빅 퍼포먼스(big performanc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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