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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국미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한 예술철학자 조요한 선생을 애도하며

최태만

지난 4일 조요한(趙要翰) 선생께서 향년 76세로 별세하셨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 여러 차례에 걸쳐 읽고 또 읽던 책 중의 하나를 들자면 제일 먼저 선생께서 쓰신『예술철학』이 떠오른다. 앎에 대한 욕구가 왕성할 때 간결한 문체로 어려운 미학을 쉽게 요약한 선생의 논문들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한국의 미의식을 밝히고자 한 선생의 글은 훗날 필자의 사고를 다듬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한국미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한국미의 조명』(1999, 열화당)이란 저서를 통해 집대성되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요한 선생은 고결한 인품을 지닌 철학자였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숭실대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1980년 전두환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서명에 앞장선 까닭에 해직되었고, 1986년 교수들의 지지에 힘입어 숭실대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해직교수의 경력을 꼬투리 잡은 군사정권의 반대로 취임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숭실대 교수협의회에서 다시 총장으로 선출된 것만 보더라도 그가 많은 교수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필자로서는 선생께 직접 배운 것도 아니고 선생과 가까이 지낸 경험도 없다. 그저 학술대회장 같은 장소에서 선생의 발표를 경청하던 청중에 불과했던 필자가 선생을 직접 뵙고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작년 6월경이었다. 당시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관람하던 중 한 노인께서 너무도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계셔서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고 은근히 훔쳐보니 조요한 선생이셨다. 마침 그 미술관의 주선으로 찻집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말 그대로단독면담을 하였는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고 논리는 명징했다. 그날 선생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학창시절에 김환기의 집에서 하숙했다는 이야기로부터 한국미의 특질 중에서 해학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주제 없이 이루어진 방담 중에도 선생께서는 잊지 않고 최근 미술의 동향에 대해 질문하시는 등 시종일관 젊은 후학을 배려하시는 겸손의 예의를 유지하셨다. 헤어질 때도 격려를 잊지 않으셨던 선생의 따뜻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후 석남 이경성 선생의 출판기념 회장에 참석했을 때 조요한 선생께서 병환 중이어서 행사장에 나오지 못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며칠 지나 신문을 통해 부음을 읽으니 새삼 선생의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 떠오른다.

평생 학자로서 고고하게 살아오신 조요한 선생의 삶은 필자의 천학(淺學)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인문학의 붕괴니, 스승의 부재니 하는 말이 유포되고 있는 현실에서 선생의 별세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맹자는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아 가르치는 것을 기쁨의 하나라고 이야기했지만 훌륭한 스승을 모실 수 있는 것도 그에 능가하는 기쁨이리라. 비록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가르침을 받은 바 없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의 별세가 은사의 타계만큼이나 애통한 것이 비단 필자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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