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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삶/자료의 복권 - 우리 예술의 지평 확장을 위하여

이인범

바람으로 써 갈 수만은 없는 삶의 역사

제아무리 매캐한 공기 속에 앞이 보이지 않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을 한낱 바람에 실려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바람이 봄바람 같이 감미롭지만은 않다. 때로는 바람 부는 대로 출렁거리는 세상은 스산하고 쓰리다. 탄핵풍, 탄핵역풍, 박풍, 노풍, 추풍 등으로 이어지며 휘몰아친 4?15 총선 바람들은 급기야 그나마 향후 4년 동안 우리의 생활을 맡길 정당들의 정책과 인물들에 대해 이모저모 따져볼 기회마저 앗아갔다. 요즈음 우리는 이렇듯 순간순간 불어오는 ‘바람의 감성학’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그 뒤끝이란 이제나저제나 쓴맛, 신맛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 뿐임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국제비엔날레, 엑스포 같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투어 벌인 행사들, 뉴미디어?디지털 시대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기대,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던 미술관?문예회관 설립 붐, 세계화 바람, 밀려드는 각종 이즘들..... 그간 미술판에 일었던 바람들의 면면도 그렇게 만만치 않다. 새롭게 밀려오는 바람은 대개는 너무 위력적이어서 그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던 자못 진지했던 관심사들마저 여지없이 맥못추고 그냥 별 것 아닌 것이 되곤 한다. 그래서 미술계에는 지금 당장 휘몰아치는 바람만 존재하는 듯하고, 늘 그렇게 살아 왔던 일상도, 과거도, 꿈꿀 내일도 바람과 함께 쓸려나가는 것 같다. 때로는 비엔날레가 미술계인지, 미술계가 비엔날레인지 분간할 수 없고, 뉴 미디어만 존재하고 그 아닌 것은 모두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이러한 바람들이 스치고 난 자리엔 미술계 내부의 황폐화 현상만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동안 그토록 애썼던 사립미술관들이 좌절을 거듭하고 있음을 눈 뜨고 보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후 2, 3년 동안 미술계가 또 다시 도립미술관 설립 바람으로 들뜰 모양이다. 지난 국민의 정부시절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른 바 1도 1미술관 원칙에 따라 경남에 이어 전북, 경기, 제주, 강원 가릴 것 없이 수천 평 규모의 여러 도립미술관들의 연이은 출현이 예고되고 있다. 모름지기 이와 같이 도립미술관들이 한꺼번에 개관되면, 그 예산이나 공간, 지역적 분포의 규모로 보아 우리 미술계의 판도는 또 한번 크게 요동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술관 프로젝트는 우리에겐 낯설기만 한 것이어서 그 결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까지와 같이 건물 올리고 전시회나 치르며 이를 지금 당장 먹고 마시며 흥겨워할 잔치라 여기는 한, 모처럼의 이 미술관 프로젝트들 역시 한차례 불고 지나가는 또 한줄기 바람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삶/자료의 복권을 위하여
따지고 보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가 안팎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것은 딛고 설 굳건한 토대가 단단하지도 뿌리가 깊지도 못하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이미 거기에서부터 부랑(浮浪) 생활은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현기증나게 급변하는 세상을 한층 더 시끌벅적하게 하며 잔치판을 벌이는 일은 근거없이도 우리가 흔히 저질러 온 일이다. 하지만 영구히 보존할 만한 가치있는 예술작품과 자료들을 조사ㆍ연구하고, 수집?보존하여, 소통시키고, 교육하고, 즐기고 후세에 전해 줄 수 있도록 모색하고자 하는 견고한 미술관이나 자료관 같은 근본적인 인프라 구축은 그다지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며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을 감내해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요즈음같이 현란한 세상에서 아득한 미래를 위하여 우리의 열정과 노력을 비축하는 것은 종교에서도 기대하기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인생을 의탁할 절집 하나 없이 방황으로 일관하는 우리 미술계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처량한가? 부처님(佛)도, 읽을 텍스트(法)도, 이를 지킬 스님(僧)도 없는 절집을 절집이라고 꾸리려는 기대는 얼마나 헛된 일인가? 그러한 스산함이나 처량함을 못이겨 벌이는 일이란 고작 빈 수레 바퀴 굴러가듯이 소리는 요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개혁담론이든 보수담론이든 우리의 진정한 삶의 면모를 주시하고, 그 지평을 확장하는 일엔 작은 기여도 하지 못하면서, 추악하고 공허한 헤게모니 다툼이나 하는 일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예술계도 스스로의 삶의 역사와 원풍경을 외면하면서 공허하게 한 개인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고대할 때는 지났다. 정책 입안자이든 고립된 개인들이든 어떻게 하면 우리 예술계가 해석학적 경험의 지평을 넓고 깊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일이다. 무엇이 진정한 것이고, 우리의 열정을 받칠 제단이 어느 장소인지를 다시 궁리해야 한다. 그 방법이 어찌 자명할 수야 있겠는가? 그렇긴 해도 우선 의심할 바 없는 일부터 시작하면 될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스스로 존중하고 그것을 우리 당대의 체험과 표현으로 이끌어내는 실마리로 삼기 위한 조치들이다. 오랜 기간 검증을 거쳐 발전되어온 삶의 증거들, 그것들이 발산하는 메시지를 관리하는 정교한 장치인 미술관이나 아카이브, 도서관, 자료관같은 시스템들의 이념과 방법을 제스처로만이 아니라 정직하고 용기있게 채택해야 한다.

이 땅에 살고졌던 숱한 삶들이 잃어버린 발언권을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시도 때도 없이 불는 바람들에 따라 특히 서구로부터 받아쓰는 예술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을 생산하고 스스로의 역사를 기술해 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이 땅의 ‘현대생활의 영웅주의’가 그 천박함을 떨치고 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말같이 녹녹하기만 한 일일 리 없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 예술사는 일제 강점, 거듭된 전쟁과 정변 등 굴곡된 시기를 거치며, 삶이 ‘감시와 처벌’, ‘광기’로 굴곡, 억압되고, 그나마 그 흔적마저 극심하게 망실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와중에 이제 그 뜨거웠던 역사체험의 당사자들마저 노쇠화로 잇달아 세상을 등지고, 현존했던 개개인들의 역사적 삶 체험이 역사적 실재와 무(無)의 상태로의 환원 사이의 기로에 놓이는 급박하다 못해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일이 되었다. 이야 말로 문예진흥원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연구소가 원로예술인들과 함께 벌이는 <한국근현대예술사증언채록사업>의 윤리적 요청근거이며 한국근현대 예술아카이브가 당장 착수되야 하는 이유이다. 해석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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