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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미술과 사회

윤진섭

얼마 전에 묵직한 소포 하나를 받았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에서 보내온 ‘한국의 전업미술가’란 제목의 2권 짜리 화집이었다. 마침 이 책에 ‘전업미술가와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글을 기고했던 터라 반갑게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회원들의 다양한 작품세계가 수록돼 있었다. 그것은 눈을 위한 잔치였다. 구상과 추상을 망라하여 풍경과 인물 그리고 정물에 이르는 다양한 그림들이 제각기 시선을 끌고 있었다.
이 그림과 조각이야말로 우리 시대 예술의 저변을 이루는 하나의 자산임에 분명하다. 그 도판 하나하나는 그것의 주인인 작가가 겪었을 법한 일상의 자잘한 행복과 신산(辛酸)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할 뿐이니, 그러한 감정들은 작품 속에 녹아있어 간접적으로 전달될 뿐이다. 그것들을 읽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일 터이다. 관람자의 감상 능력에 따라 그것은 읽혀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 할 수도 있다. 만일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행정가나 관료라면, 그는 이 책을 통해 오늘의 창작 현실이나 조건을 유추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탁월한 혜안을 지닌 자라면, 그는 이 책에 수록된 작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른바 유능제강(柔能制剛)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다. 부드러운 물이 강한 둑을 허무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이는 썩어 없어지나 혀는 오래 남는 것과 같은 경우와도 같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면에서 보자면, 예술은 바로 이 부드러운 물이나 혀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정치가 강경 일변도로 나아갈 때 아름다운 음악이나 훌륭한 미술이 꽃을 피우면 그것의 중화작용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그런 대로 부드러움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공자가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정치인들은 문화나 예술의 중흥에 힘쓰기보다는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참으로 보기에 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모적인 현상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다시 화집을 들여다본다. 책의 앞머리에 실린 ‘2004년 한국 전업미술가 실태조사’에 시선이 머문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분석해 놓은 것이다. <문항 11>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어 있다. “귀하께서는 작품 판매(창작소득)로 본인과 가족의 생활이 가능합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예:4%, 아니오:96%>이다. 이번에는 <문항 13>을 보자. “귀하께서는 연간 작품 판매로 얼마의 소득이 가능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500만원 이하:70%, 2000만원 이하:3%, 1000만원 이하:18%, 3000만원 이하:2%, 1500만원 이하:4%>로 되어있다.
이 충격적인 수치는 “올해 1-3월 도시근로자 가구 월평균 소득 290만원”(동아일보 2004년 7월 15일자 B 3면 참조)에 턱없이 못 미치는, 실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의 생활비를 연상시킨다. 한달 평균 40만원의 수입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작품활동을 영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배우자나 가족의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항 12>는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작품 판매로 본인과 가족의 생활이 안 된다면 주 소득원은 어디에 있습니까?”란 질문에 대해 <본인의 부업:29%, 배우자 소득:53%, 기타:18%>라고 답변하고 있다.

미술계의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볼진대, 문학, 음악, 연극, 무용 등 다른 장르의 형편이 이 보다 나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한 마디로 예술계가 총체적인 난국에 부딪친 형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살림에 어찌 문화예술계에만 지원을 증대하라 하느냐고 정부는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호소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관광부 예산 1조원을 일찌감치 초과한 마당에 아직도 월 평균 수입 40만원의 예술인들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현실은 ‘문화입국’의 슬로건이 무색한,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은 사회가 잘 돌아가게 하는 윤활제이자, 중화작용을 하는 일종의 중화제이다. 이는 특히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강성 일변도의 분위기가 감도는 우리사회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것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예술의 중흥에 필요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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