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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설계도를 보여주세요.

황록주

요즘의 전시를 보면, 작가도, 전시를 만드는 사람도 참 여러운 일을 해내는구나 싶다.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던 시절에는 몇 사람이 작품을 운반하여 자리를 잡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던 전시가 이제는 공연 무대 몇 개를 한꺼번에 만드는 것에 비견할만한 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의미의 얼개를 맞출 수 있는 것이라면 쓰레기도 불사하는 광적인 재료수용력을 보여주고 있고, 한편으로는 컴퓨터 전문가들이 울고갈만한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 작품이 들어앉는 위치를 담아내는 알량한 전시 도면만으로는 전시를 그려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국제 전시를 준비하면서, 외국의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보내오는 프로포절을 받아보면 작품의 수준이나 내용을 떠나 그 꼼꼼한 준비성에 저절로 칭찬을 하고 싶어진다. 한 작품이 설치되는 데 필요한 공간의 크기부터 각각의 장비가 들어가는 위치, 또 실제 필요한 장비의 사양이나 필요량, 그 외에도 부수적으로 설치되어야 하는 여러 가지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하게 기록해 놓은, 말 그대로 여러 장으로 구성된 설계도를 내놓는 것이다. 물론 그 작품이 한 번 설치가 되었던 것이라면 실제 전시 광경도 빼놓지 않고 첨부자료로 내놓는다.

사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포트폴리오는 그저 완성된 작품의 모습을 차례로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즉 작품의 이미지와 제목, 제작년도, 크기, 재료로 이어지는 작품의 캡션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렀고, 작가들은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으로도 작품을 만들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작품의 모습과 방향이 변한만큼, 작품을 위한 포트폴리오와 프로포절의 양식도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여러 색의 작은 조각을 그림처럼 벽면에 설치하는 토니 크랙의 작품들은 개별 조각마다 일련번호가 붙어 있고, 그것이 설치되는 위치를 도면으로 제작해두었다고 하니, 작가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전시를 만드는 사람들이 알아서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매체로 여러 모습의 설치를 하는 작품일수록 보존의 측면에서라도 더더욱 설계도가 필요하다. 또한 그러한 매뉴얼이 함께 보존될 때에만 작가가 사라진 이후에라도 남은 작품이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작품의 크기는 설치되는 공간에 따라 유동적일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 실제로 필요한 재료들을 늘 손쉽게 구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남기는 것이 작가들 스스로에게나, 그것을 전시하고 보존하는 사람들에게나 꼭 필요한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작품 설계도를, 전시기획자는 전시 설계도를 준비하는 일에 다같이 힘을 쏟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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