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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봉사 제 닭 잡아먹기 식 전시는 그만 하자.

이동국

예술의전당은 서예 미술 디자인 등 전시는 물론 음악 연극 오페라 발레 등 공연분야의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매일 펼쳐지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분야는 물론 이지만 타 분야와 비교도 본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은연중에 이루어진다. 필자가 서예 분야의 특수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라 주저도 되지만 서예전시를 두고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자가 일하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의 2004년도에 전시되고 있는 대관실정을 우선 보자. 총 36건에 284일이다. 기획전 3건에 3개월 정도를 빼고 나면 거의 매일 대관전시가 열리는 셈이다. 문제는 많이 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전시가 열리는가하는 점인데, 공모전 18건(50%),국제전 3건(8%),회원전 8건(22%), 개인전 3건(8%), 기타 2건(5%)이다. 그러나 국제전이나 회원전도 작품의 질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공모전과 크게 변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서예전시의 사정상 인사동 백악예원이나 물파아트센타, 세종문화회관, 지방문예회관 정도의 전시장을 빼면 전시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하 전당) 전시의 판도를 보면 곧 우리나라 서예사정을 대강 파악 할 수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전당 대관전을 보면 특이한 전시풍토가 몇 가지 발견되는데, 먼저 거의 대부분 작가들이 주도가 되어 직접 전시를 열고 또 작품을 출품한다는 사실이다. 서예 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오히려 지적하는 사람이 이상 할 정도인데 심지어는 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공모전의 심사는 물론이고, 기획자가 자기 전시에 출품을 하기도 한다. 그것을 관행이라고 혹자는 항변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에서는 늘 서예가 스스로 어느 분야 못지않은 프로예술가임을 자부하고 목청을 높이는 것을 목도하는데, 객관성이 생명인 전시의 상식에서 비추어 볼 때 정말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말 그대로 전시는 펼쳐서 보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지만 예술가와 엄격히 구분되는 제3자적 입장의 예술행정가나 이해 관계자들이 존재하는데, 큐레이터ㆍ비평가ㆍ기자ㆍ교육자ㆍ관객은 물론 스폰서 등이 그들이다. 전시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들이 해당분야의 확고한 입장을 객관적으로 견지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서예가들이 정작 작가를 위해 존재하는 이러한 제3자적 입장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발언을 종종 하는 경우를 보는데 ‘네가 글씨를 아느냐’ ‘네가 붓을 잡아 보기라도 했느냐’등이다. 물론 서예가들보다 글씨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전시판에서는 각자 전문영역에서의 역할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전시판에서 작가의 역할은 작품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다. 작가가 팔을 걷어붙이고 작가선정도 하고, 심사도 하고, 홍보도하고, 스폰서링까지 못 할 바는 없지만 그것은 작가의 자만이자 스스로가 관객을 모독하는 것이고 결국 자기작품의 부실로 나타날 뿐이다. 요즈음처럼 전시가 분명한 주제로 세분화되고 그 전문화가 가속화되는 판에서는 이러한 역할 구분여부가 전시성패는 물론 해당 장르의 생사문제까지 결정짓는 핵심요인이 되는 것이다.
전시주제가 나왔으니 말이지 이점에서 보더라도 전당의 대관전시는 전시목적이 딴 데 있다면 몰라도 이미 열기도 전에 실패를 하고 있다. 무슨 돌림병에 걸린 것처럼 공모전 18개중 ‘대한민국’이나 ‘한국’이 들어있는 전시명칭이 무려 17개나 된다는 사실은 17개 전시 모두가 이미 아무런 주제도 없이 마구잡이로 나열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 똑 같다는 말이 된다.
전시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막말로 어느 한 전시를 보면 나머지는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과적으로 작가들이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격이 되겠지만 관객의 이러한 태도는 ‘자존심’을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자기 팔 자기 흔들기 식’ 공모전 위주의 현 한국서단의 구조 안에서 작가들이 먹고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답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기능이 미분화된 현 환경이 이러한 관행의 핑계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이 작가를 구원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 문제마저도 작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짧은 소견이지만 필자가 경험하건데 ‘예술만큼은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만 산다’ 는 것이 만고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서예가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처음 붓을 잡을 때 오직 예술만을 생각했다고 했지 밥벌이 수단으로 했다는 사람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공모전의 난립에 대한 책임문제에 대해서는 대관단체나 서예가들 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과거 사회적인 여건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핑계를 될 수 있지만 수익성을 앞세운 나머지 공공박물관으로서 그 최고의 질적 수준의 유지나 분명한 성격구현을 위해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관되고도 엄격한 대관기준을 적용하지 못한 전당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아울러 자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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